미움받는 굴림체

최근 디자인 전공자들이 모인 한 유머 사이트인 ‘디자이너의 뻘짓’에서는 굴림체에 대한 내용이 자주 게재됐다. 대부분 굴림체 사용을 지양하자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심미성 및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주장과 일본의 나루체라는 서체를 본떠 만들었다는 주장이 가장 크다. 반면에 “굴림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실수를 했을 때 굴림체를 마주하는 것이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며 활자 자체에 문제가 있진 않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의견은 굴림체를 지양하자는 내용이었다. 굴림체는 어떻게 태어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길래 미움받는 것일까. 정말 굴림체는 미움받아야 마땅할까.
많은 사람이 ms오피스의 기본 폰트로 알고 있는 굴림체는 1970년대에 일본에서 사진식자기와 함께 들어왔다. 당시 한국은 출판을 위해 활자조판용 사진식자기가 필요했는데 기술이 없어 일본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일본 사진식자기 회사는 기계를 팔기 위해 한글 자판도 직접 제작해서 판매했다. 그때 활자 도안사 최정호에게 값싸게 원도를 주문을 맡겼고 지금도 많이 쓰이는 명조체나 고딕체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 외 대부분 서체는 일본 서체에 맞춰 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굴림체도 일본 서체인 나루체의 성격을 응용해 제작되었다. 한국에 사진식자기를 수입하던 회사 중 하나인 ‘모리사와 사진 식자기 제작 주식회사’는 최정호에게 나루체 한자와 같이 쓸 수 있는 한글 서체를 의뢰했다. 굴림체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굴림체의 모태가 된 일본의 나루체는 둥근 고딕체 계열로, 획의 끝이 둥글고 곡선이 많은 글자다. 나루체는 1970년에 나카무라 유키히로가 1962년 이탈리아에서 개발한 유로스타일체에 영향받아 개발한 글자체다. 나루체는 당시 인쇄 서체의 개념을 뒤집는 글꼴이었다. 이 때문에 여기저기서 나루체를 주목했고 각종 대회에 입상했다. 디자인계에서도 인기가 높아 디자인이나 조판 글꼴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점유율이 상당했고 이후 일본의 둥근 고딕 서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루체는 시인성과 가독성까지 뛰어나 여러 사인 시스템에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일반 국도의 도로 안내 표지판의 서체로 사용되었다.
나루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획의 끝과 선이 둥근 형태가 가장 큰 특징이다. 또 자소 간에 서로 분리가 되어있으며 일본꺾 글씨의 성격상 사각틀에 맞춰진다. 이 같은 특징은 굴림체를 만들 때도 적용됐다. 둥근 고딕의 형태처럼 줄기의 양 끝과 줄기가 꺾이는 곳은 모두 굴려 주었다. 자소를 분리하는 원리도 적용돼 ‘ㅋ’의 가운데 덧줄기가 떨어졌다. 나루체처럼 사각틀에도 가득 채워져 글자꼴 안공간이 넓은 편이다. 그런데 디지털 폰트 상의 굴림체는 이런 특징 때문에 다루기가 어렵다. 최정화, 김지현 씨의 논문 <굴림체의 조형적 특징과 선호도 분석>에 따르면 굴림체를 본문용으로 사용할 경우 ‘ㅋ’이나 ‘ㅌ’과 같이 덧줄기가 있는 자소는 줄기의 굵기가 조절되지 않아 얼룩덜룩 보인다. 또 이 논문에서는 서체를 사각틀 밖으로 맞추다 보니 속 공간은 커지고 주변 공간이 줄어들었는데 이 같은 특징이 앞글자의 모음글자와 뒷글자의 자음글자가 붙어 보이게 만들어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굴림체를 만들었던 최정호도 <한글 글자꼴 기초연구>의 [서체 개발의 실제]에서 “굴림체를 본문용으로 사용하면 시각적으로 눈에 설기 때문에 문맥을 머리에 집어 넣어주는 중간 역할을 해야 하는 활자의 기능을 다 하지 못한다”며 본문으로 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언급했다. 최정호는 그가 만든 굴림체가 본문용도 표제용도 아닌 중간 상태이지만 “굴림체의 사각틀을 꽉 채우고 속공간이 넓은 특징이 크게 사용할 경우 호소력이 생길 것”이라며 굴림체의 목적이 우선은 디스플레이용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디자인계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그래픽 디자이너 심우진 씨는 굴림체를 제목용이나 본문용으로 기준을 정하기에는 모호하다고 말한다. 그는 “본문용과 표제용으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모호하지만 그래도 아주 엄밀하게 접근하면 본문용이라는 것은 아주 긴 글에 쓰는 활자를 얘기한다. 본문에 쓰이는 서체는 장시간 글을 읽을 때 조금 더 편할 수 있도록 최적화돼서 만들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그래서 본문용 서체는 아주 예뻐도 안되고 너무 강해도 안된다”며 굴림체가 과연 본문용 서체를 염두에 두고 개발이 됐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표제용 서체는 확 잡아 끌 수 있도록 돋보여야 하는데 굴림체는 그렇지 않다”며 표제용으로도 애매하다는 의견을 비쳤다.
하지만 디자이너 심우진 씨는 그렇다고 굴림체를 지양하자는 말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굴림체도 문제가 있는 점이 있다. 그러나 디자인을 할 때 항상 서체 자체만 가지고 디자인하진 않는다. 쓰다 보면 그것 자체가 잘 어울리는 상황이 있다”며 다른 부분과 통합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굴림체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면 서체의 위치가 애매하지만, 그 형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며 “굴림체가 만약 가독성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면 많은 사람이 행정보고서 같은 딱딱한 용도에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상황을 참고 써왔다는 것 자체가 가독성을 갖추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심우진 씨의 말에 따르면 굴림체가 어떻게 생겼느냐보다는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한편 굴림체는 생긴 모습 때문에 미움받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사실만 가지고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활자를 많이 다루지 않는 비전문가에게도 미움받고 있다. 디자인 관련 일을 하고 있는 A씨는 “일본의 나루체를 어울리지도 않게 한글에 적용한 글씨체가 굴림으로 알고 있다”며 “문화 정체성을 위해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굴림체 사용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 B씨도 “일본의 글씨체를 한글에 적용했다고 하니 안 예뻐 보인다.”라며 굴림체의 태생 때문에 막연한 반감을 보였다.
우리나라 폰트 회사 중 하나인 산돌에서 서체를 디자인하고 있는 디자이너 석금호 씨는 MK뉴스에서 “지금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굴림체’는 일본서체대회에서 1등 한 폰트다. 전 국민이 그걸 쓰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굴림을 몰아내고 고유의 아이덴티티가 있는 서체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때 인터넷에서는 그가 쓴 <굴림체의 디자인 원류는 일본>이라는 글이 공유되면서 비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굴림체를 지양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한글 디자이너 김진평의 <한글의 글자표현>에서는 나루체또한 1962년 이탈리아에서 개발된 유로스타일(Eurostyle)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명시되어있다. 만약 굴림체가 일본의 서체를 본떴기 때문에 ‘일본의 것’이라는 오명을 써야 한다면 일본의 둥근 고딕 계에 혁명이었던 나루체도 이탈리아 서체일까.
일각에선 나루체의 원리 자체를 한글에 적용한 것을 문제로 제기한다. 그러나 심우진 씨는 나루체의 원리를 가져와 한글에 적용한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한자나 일본글자같이 전혀 다른 문자에 있는 것을 한글에 접목했다는 것은 박수받아야 하는 일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가 쓰고 있는 명조나 고딕이라는 단어뿐만 아니라 근대 활자기술도 일본에서 들어왔다”며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전통에 덧붙여야 문화는 풍성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분명 당시 우리나라가 사진식자 기술이 없어 독립적으로 활자를 만들 수 없었던 점, 많은 서체가 일본의 서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점은 슬픈 역사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나 태생으로 활자의 쓰임을 결정해야 하는 지는 의문이다.
로마자 서체 디자이너인 고바야시 아키라도 서체의 태생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독일 모노타입사의 폰트 디렉터가 된 고바야시 아키라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로마자 서체를 만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폰트의 비밀>에서 ‘서체의 태생을 중요시하는 일본인’에 대한 얘기를 언급한다. 이를테면 ‘이탈리아고 태생의 보도니(Bodoni)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는 쓸 수 없다.’라던가는 ‘타임스 로만(Times Roman)은 영국에서 만들어져서 영국스럽다’는 식으로 로마자 폰트에 ‘일반상식’을 지키는 일본인 말이다. 고바야시 아키라는 이런 ‘상식’은 일본에서만 이야기되고 있다며 서체를 고르는 데는 태생보다 외형적 조건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굴림체를 아직도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굴림체를 한번쯤 측은히 여겨보라. 서체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디자이너 이용제 씨는 <한글 + 한글디자이너 + 디자이너>에서 “좋은 폰트를 얘기할 때에는 어떤 폰트를 나열하기보다 좋은 폰트의 기준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어떤 서체든 좋은 서체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서체 자체가 못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서체를 어떻게 다룰지 판단하는 것은 모두 디자이너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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