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비평
2018년 12월 8일

교회와 극장 사이, 퀴어들의 연극

<삼일로 창고극장 봉헌예배>, ‘쿵짝 프로젝트’ 공동창작, 삼일로 창고극장, 2018.12.1-2018.12.9

삼일로 창고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2018년 수많은 소극장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대학로를 떠나는 와중 1970년대 소극장 운동의 상징이자 최초의 민간극장이 재개관한다. 마지막으로 폐관한지는 3년 만이고, 전체 폐관 횟수를 따지자면 7번만의 부활이다. 민주화의 성지 명동성당과 향린교회, 개신교 보수화의 상징 영락교회, 그리고 한국 퀴어 문화의 중요 거점 종로에 둘러싸인 삼일로 창고극장. 그 부활의 중심에는 <삼일로 창고극장 봉헌예배>(이하 ‘봉헌예배’)가 있다.

삼일로 창고극장과 퀴어 연극

<봉헌예배>는 그 이름대로 기독교의 봉헌예배(1)를 가져온 연극이다. 이 공연의 서사는 연속적이거나 명확하지 않다. <봉헌예배>는 마치 실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극 진행 구조를 가진다. 공연의 홍보는 개신교의 예배 주보를 통해 이루어지고, 각 장면은 교회 예배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로 작용한다. 그리고 △드랙퀸(2)의 찬양 △퀴어 예수의 생애 성극(聖劇) △퀴어들의 간증으로 이어지는 예배는 삼일로 창고극장을 봉헌(3)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찬송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소극장 운동, 젠트리피케이션, 노동 문제를 통해 뻗어나온 한국사의 가지는 페미니즘, 퀴어 이슈를 타고 마치 십자가처럼 양 옆으로 뻗어나간다. 이렇게 수직적 역사성에서 출발해 수평적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삼일로 창고극장의 <봉헌예배>는 연극에 대한 이야기와도 이어진다.

<봉헌예배>의 연극적 고민은 극장이라는 장소를 통해 구현된다. <봉헌예배>는 삼일로 창고극장의 장소특정적 성질들을 언급하며 극장이 누구에게 열려있는 공간이어야 하는지를 재차 묻는다. 삼일로 극장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 민주화와 보수화 그리고 종로 일대의 퀴어 문화가 중첩되어 있는 장소다. <봉헌예배>는 이러한 삼일로 창고극장의 속성을 퍼포머를 통해 언급한다. 이때 관객은 눈 앞의 퍼포머가 가지고 있는 △퀴어 △무신론자 혹은 기독교인 △연극인 △한국 사람 등의 속성들을 알아차리게 된다. 눈 앞의 몸을 거쳐 감각된 퍼포머들의 교차성은 어떠한 위계도 없이 수평적으로 열거되어 퀴어라는 이유 만으로 그들에게 가해지는 박해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공연 후반부에 발화되는 마태복음 11장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를 통해 저항과 포용의 의미로 나아간다. <봉헌예배>에서 극장은 이제 그 스스로 △그동안 무대에서 밀려났던 존재들 △차별과 혐오로 죽임을 당한 존재들 △편견과 폭력에 눌려 떠돌던 사람들에게 바쳐진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에게 봉헌된다.

이처럼 <봉헌예배>가 읽어낸 삼일로 창고극장의 역사적 맥락은 주류 밖, 밀려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장소다. 그 장소성은 곧 예수의 종교적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오늘날 더이상 소외된 이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예배의 맥락과 와닿는다.  

극장 안 예배의 의미

예배와 연극에는 확실히 교차점이 많다. 둘 모두에게는 퍼포먼스적인 요소들이 있다. 원래 위계적인 장소가 아니었다는 점도 주목해 볼만 하다. 원래 개신교의 예배는 신도들이 모여 함께 말씀을 나누는 것에 의의를 둔다. <봉헌예배>는 이러한 예배의 정신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서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외면당하는 것이라 말한다. 관객과 만나는 것의 어려움을 끊임없이 외치는 오늘날의 연극과 똑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 동일한 질문들, 같은 문제의 연속 속에서 <봉헌예배>가 내세우는 해답은 기성 연극인들과는 전혀 다르다. <봉헌예배>는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관객에게 어떻게 편하게 다가가야 할 지를 묻지 않는다. <봉헌예배>는 그 대신 연극, 극장, 예배가 본래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묻는다. 그 질문은 공간인 극장에 대한 질문임과 동시에 ‘이 모든 행위’로서의 연극이 벌어지고 있는 ‘바로 이곳’에 대한 물음이다. 그렇게 장소를 기반으로 더욱 구체화된 의문은 다른 어떤 추상적인 논의보다도 우리에게 실질적인 이야기가 된다. 모두가 당장 살아가는 한국, 이곳. 교회들과 퀴어 문화가 겹쳐진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이 모든 의문이 하나의 정련된 집합으로 나온다면 그것도 물론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냥 가능한 선에서 보여주면 그만이다. <봉헌예배>는 그래서 솔직하게 자신들이 보여줄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극의 후반부, 각각의 퍼포머들이 나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커밍아웃, 연대 표명 등에 대해 말하는 간증 장면은 그 자체로 이 공연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각 퍼포머들은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 감정들을 모두 무대 위에서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백, 간증은 이 사회의 모든 억압받는 소수자들에 대한 강한 연대의 선언으로 읽혀진다.

<봉헌예배>에서 예배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드리는 것’이며 함께 만나는 것이다. 그 신이 반드시 기독교의 신이 아닐지라도 그 모든 것이 바쳐지는 대상이 그들의 하나님이 아닐 지라도 <봉헌예배>의 기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공연이 내민 손길의 방향에는 분명 뚜렷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

서동완 객원기자

연극원 거주자

official0504@gmail.com

(1) 봉헌예배: 성전봉헌예배의 맥락. 교회를 완공한 뒤 그 건물을 신에게 바치겠다는 의미로 지내는 예배.

(2) 드랙퀸: 여성성을 과장하여 스스로를 꾸민 사람. 드랙퀸에서 ‘드랙(Drag)’은 남성성 혹은 여성성을 과장하여 꾸미는 것을 말한다.

(3) 봉헌: 일반적으로 국어에서는 물건을 만들어 바친다는 뜻이지만 기독교 용어로는 특별히 하나님에게 물건, 자신의 모든 행위, 기도 등을 기꺼이 바친다는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