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2018년 11월 27일

박물관을 거느린 전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조선미술전람회 계승해 1949년부터 1981년까지 열려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의 문화 지배 수단

 

박물관(Museum)은 이제 예술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문화적 책임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한국의 박물관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동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일제가 들여온 박물관 제도는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전해졌다. 독재정권은 국가 주도 박물관 정책을 통해 문화를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그 문화적 레토릭의 대표주자가 바로 국립현대미술관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다.

 

조선이라는 박물관

대한제국 황실은 1909년 창경궁에 제실박물관을 열었다. 한국 최초의 박물관이다. 제실박물관은 그러나 1911년 국권침탈 이후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됐다. 이왕가박물관은 일제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봉사했다. 박물관 제도를 시작하자마자 일제에 빼앗긴 셈이다.

 

일제에게 조선은 그 자체로 박물관이었다. 신라의 공예, 고려의 청자, 조선의 궁중음악은 일본의 옛 모습을 간직한 원시로 여겨졌다. 발전한 문명이 정체된 원시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했다. 제국주의와 민속지학은 그래서 불가분하다.

 

일제는 대한제국 국권침탈 이후 한국의 박물관 제도를 주도했다.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박물관과 미술관을 짓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를 차례로 선보였다. 일제의 식민 통치로 ‘발전’한 조선을 전시한 것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박물관 제도는 해방 후까지 이어진다.

 

조선총독부미술관 Ⓒ우리역사넷

 

석연치 않은 개관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10월 20일 개관했다. 그날은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가 열리는 날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은 사실 국전 개막에 맞춰 급조된 것에 가깝다.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관장 김임용은 공간지 1969년 10월호에서 미술관 부지를 아직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부지 결정이 불과 1개월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가 국립현대미술관 개관과 국전 개막을 서둘러 맞춘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문공부는 잡음이 많은 국전 운영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맡기려 했고, 미술계는 국전과 미술관 운영을 분리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문공부 관료는 미술관의 국전 운영을 서둘러 관철하려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1969년 제3공화국은 민족적 정통성·주체성을 내세운 종합민족문화센터 계획 아래에 국립현대미술관을 설립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과 국전 개막을 같이한 것은 따라서 국전이 문화공보정책 상 중요했다는 방증이다.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포스터, 1969 Ⓒ국립현대미술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조선미술전람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즉 국전은 1949년 경복궁미술관에서 처음 열렸다. 경복궁미술관은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 지은 미술관이다. 국전의 개최 논의는 그러나 적어도 1946년부터 시작됐다. 동아일보는 1946년 4월 28일 “새조선 꽃피울 국전”이라는 기사를 냈다.

 

해당 기사는 “문교부에서는 매년 계속하여 정기적으로 국가에서 주최하는 미술전람회를 열려고 방금 준비 중이다. … 이 전람회에는 동양화·서양화·공예·조각의 각 부 제작품을 종합 전람하려는 것으로 기왕 총독부시대의 문화기만정책에 의한 명목만의 전람회와는 그 성격부터 다른 점에서 힘차게 일어선 예술 조선에 새로운 화제와 긴장을 던지고 있다.”고 전한다.

 

‘총독부시대의 문화기만정책에 의한 명목만의 전람회’는 바로 선전, 조선미술전람회이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부터 선전을 열어 한국 근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애당초 경복궁미술관도 선전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국전이 논의되기 시작한 1946년은 해방으로 선전이 중단된 직후이다.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같은 장소에서 열린 같은 전시였다. 결국, 국전은 선전을 계승한 것이다.

 

국가 주도 미술

국전이 과연 선전과 달리 ‘예술 조선에 새로운 화제와 긴장을 던졌을’까. 1949년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국전은 몇몇 기사를 통해 그 성격을 짐작게 한다. 동아일보는 1949년 12월 7일 “국전특선자수상식 중앙청서 성대히 거행”이라는 기사를 냈다. 아래는 해당 기사이다.

 

“이 국무총리, 안 문교부장관 … 비롯한 각계 유지가 참석한 가운데 문교부 조 문화국장의 사회로 열리었다.”, “먼저 국기경례가 있은 후 안 문교장관으로부터 ‘우리나라 특수성을 발휘하여 세계만방에 자랑하는 것은 예술인의 절대한 사명이니 앞으로 더 한층 노력하여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달라’, 이 국무총리로부터 ‘처음 있는 대한민국 제1회 미술전람회는 민국의 우리의 이상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 민족의 지침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더욱 민족정신의 양양과 국가 관념의 강화를 위하여 노력하여야할 것이다.'(후략)”

 

국전을 관람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1969 Ⓒ경향신문

 

당시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고희동은 “그러나 긴 역사를 가진 우리민족, 끈기 있는 우리 문화의 전통이야 한때의 비운에 고통은 받았을망정 회복이 되고야말 것은 원리에 서있는 것이다.”라고 국전을 소회한다. 또한 당시 국전 심사를 맡은 배운성은 “우리의 정부가 수립된 후 처음 개최된 국립미술전람회인만큼 … 남의 나라에 우리 민족의 미술 역량을 소개하는데 있어 중대한 의의가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미술을 민족의 문제로 치환한다. 일제가 선전을 통해 문명·원시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면, 남한 정부는 국전을 통해 전통·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도출한다. 국가가 미술을 주도하여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 것은 제1공화국이 일제가 이식한 미술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국전은 그렇다면 동시대 화단을 어떻게 지배했을까. 1969년 제18회 국전의 대통령상은 박길웅 화백이 수상했다. 같은 해 10월 15일 동아일보가 낸 기사에 따르면, 대통령상 수상자는 상금 1백만 원과 세계일주여행 경비 및 파리 6개월 체재 비용을 받았다. 한국은 1981년 이전까지 해외여행이 금지됐다. 세계일주여행과 파리 6개월 체재는 따라서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로마상에 버금가는 영예였을 것이다. 통계청의 물가상승 배수에 따르면 당시 1백만 원은 올해 10월 기준 2천만 원에 해당한다.

 

1969년 10월 18일 경향신문이 낸 “재고돼야할 국전”라는 기사는 당시 잡음이 끊이지 않던 국전을 비판하면서도, “하나의 진전이라면 추천작가상제도(유럽 여행의 특전)의 채택이다.”라고도 전한다.

 

박물관을 거느린 전시

국전은 박물관과 전시의 관계를 뒤엎었다. 국전은 경복궁미술관에 어떤 기관이 들어서든 열렸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45년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경복궁미술관을 인수하여 개관했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이전했다가 53년 복귀하고, 54년 남산으로 이전하는 등 경복궁미술관을 들락날락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69년 경복궁미술관에 자리 잡았다가 73년 덕수궁으로 이전하는 등 비슷한 모양새였다.

 

국전이 경복궁미술관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1972년이다. 국전 운영을 맡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복궁에서 덕수궁으로 이전하면서, 1973년부터는 덕수궁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경복궁미술관은 1939년 낙성부터 1972년까지 국가 주도 전람회를 열었다.

 

국전은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겨 1981년까지 열렸다. 국전은 박물관을 거느리는 전시, 공간을 초월하는 시스템이었다. 전시가 박물관을 거느리며 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써 내리는 상황은 국가 주도 미술, 박물관 제도의 단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레토릭일 것이다.

 

참고문헌

목수현, 「한국근현대미술사에서 제도에 관한 연구의 검토」, 한국근현대미술사학, Vol.24, No.-,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2

장엽, 「국립현대미술관 40년사」, 국립현대미술관연구논문, Vol.1, No.-, 국립현대미술관, 2009

“새朝鮮꽃피울國展”, 동아일보, 1946.04.28

“國展特選者授賞式 中央廳서盛大히擧行”, 동아일보, 1949.12.07

“再考돼야할 國展”, 경향신문, 1969.10.18

 

최민기 기자

choiminki199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