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18년 11월 13일

2006 – 2018,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지난 10월 26일은 ‘아르스 노바’의 마지막 공연 “서울시향 2018 아르스 노바 IV: 관현악 콘서트가 펼쳐진 날이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는 13년간 이어져온 ‘아르스 노바’에 관한 기록 사진과 관련 종사자들의 소회가 담긴 영상을 볼 수 있었다. 곧, 화면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아르스 노바의 정신은 계속됩니다”라는 자막이 떠올랐다. 이같은 선언은 우리에게 그저 안타까워만 하지 말고 그간 응축된 ‘아르스 노바’의 정신을 이어나갈 것을 요청한다.

 

이번 공연에서도 ‘아르스 노바’의 정신은 맴돌았다. 롤란트 클루티히의 지휘 아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다섯 개의 관현악곡>(한국 초연) ▵ 비올라 연주가 타베야 치머만과 함께 요르크 횔러의 <비올라 협주곡>(아시아 초연) 그리고 폭발적인 환호성에 잇따른 앙코르 연주 이후 15분간의 인터미션이 있었다. 이어서 관객석을 둘러싼 스피커 네 대를 통해 ‘재생’된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의 <소년의 노래>(한국 초연) ▵ 마르크앙드레 달바비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연주회>(아시아 초연)가 차례로 청중에게 다가왔다.

 

 

‘아르스 노바’의 짧지만 유구한 시간

 

‘아르스 노바’(arts nova)는 2006년 4월에 시작해 지난 10월 26일 공연을 끝으로 중단된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프로그램이다. ‘아르스 노바’는 세계 초연 22곡, 한국 초연 69곡을 비롯한 250여 곡목을 거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20세기와 21세기 음악축제”(1)이자 “한국 음악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2)로 자리 매김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진은숙 작곡가가 있었다.

 

나아가 ‘아르스 노바’는 마스터 클래스를 매번 진행해 왔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조현화는 진은숙 작곡가와 ‘아르스 노바’의 마스터 클래스에 관해 아래와 같이 술회한다.

 

“저보다 더 젊은 작곡가들에게 아르스노바에서 제공하던 기회들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젊은 작곡가들은 이미 큰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플랫폼이 가지고 있던 훌륭한 교육적 측면과 후대의 작곡가를 양성하는 기능은, 100% 무료로 마스터 클래스를 운영하(…)는 진은숙이라는 작곡가 한 개인의 헌신과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3)

 

이제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우선, 우리학교 서초 ⠂석관 캠퍼스 도서관에도 비치된  <현대음악의 즐거움 – 서울 시향 ‘아르스 노바’ 10년의 기록>(이하 ‘<현대음악의 즐거움>’)은 ‘아르스 노바’에 대한 가장 친절한 동시에 치밀한 기록이자 안내서이다. “(‘아르스 노바’와) 고딩 시절부터 대딩 시절, 그리고 대학원 시절까지 함께 해 왔다”라고 회고하는 현대음악 팟캐스트 ‘신음악의 다잉메시지’ 4회 ‘서울시향의 아르스 노바와 우리들의 10년’도 근사한 주석으로 다가온다.

 

여기저기 흩어진 기록들도 중요한데, 놀랍게도 <현대음악의 즐거움> 3부 다섯째 장은 ‘공연 리뷰 목록’에만 할애된다. 2006년 4월 26일 자 연합뉴스의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부터 2016년 10월 10일자 뉴시스의 “시향 아르스 노바 ‘피아노스코프’가 선보인 근사한 쾌락” 등 기성 언론의 주요 기사는 물론이고, 신예슬 음악평론가의 “모던을 향한 4개의 시선 (실내악) / Ways of Listening (관현학)”처럼 더욱 정교한 평문까지 전하면서 말이다. 지나가는 ‘아르스 노바’의 시간을 기록하는 일을 대하는 이같은 태도는 책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확인할 수 있다.

 

진은숙 서울시향 (전)상임작곡가는 <현대음악의 즐거움> 1부의 첫 번째 글에서 ‘아르스 노바’의 취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현대음악, 즉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작곡되고 있는 음악과 더불어 그 전 시대의 음악 중 자주 연주되지 않아 청중의 외면을 받았던 작품들까지 포함해 소개하는 것, 이를 통해 현대음악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의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고전 ⠂낭만시대에서 현대에이르는 음악사의 흐름 속에서 당위성과 맥락이 있는 것임을 청중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아르스 노바>의 당위

 

‘청중들에게 현대음악의 당위성과 맥락을 인식시키는’ ‘아르스노바’라는 프로젝트에는 청중에 대한 이해 역시 요구될 것이다. 청중은 이곳저곳에서 같은 음악을 듣는 청자들을 ‘모으는’ 통계적 집합이 아니다. 청중은 음악과 음원 앞에 현존하고자 ‘모인’ 사람들이다. 요컨대, 공연장의 엄숙함을 뚫고 신봉해 마지않는 록스타를 대할 때처럼 타베야 치머만에게 환호성을 지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열광으로 가득한 공연장에는 타베야 치머만이나 현대음악 자체를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유럽 악기와 그 전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현대음악은 ‘어디서부터 좋은 건지 모르겠는 것’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소리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는 점, 달리 말해 내가 듣고 있는 소리가 어떤 악기를 통해 어떻게 발생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가 클 것이며 이 경우 유튜브에 무료 공개된 온갖 현대음악들은 무용할 것이다.

 

현대음악이 어렵게 다가온다는 점에 대한 위 같은 이유는 동시에 현대음악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 당위로 작용하기도 한다. 무대에는 연주자와 악기로부터 소리가 발생하는 과정이 담긴다. 뿐만 아니라, 연주자가 다가올 소리를 초조하게 긴장하며 기다리는 시간도 함께 드러난다. 이런 시간이 연주자의 미세한 제스처를 거쳐서 청중에게 다가올 때, 소리는 단지 악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연주자와 청중 상호 간에 음악으로 성사되어야만 할 것에 가깝다. 이로써 성립한 음악이 청중과 연주자가 함께 성사되길 바란 음악과 일치하거나, 그 음악을 넘어설 때의 쾌감은 엄청나다. 이렇듯, 일단 즐겨볼 것. 서울시향과 ‘아르스 노바’가 제안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인터미션 이후에는 아무도 없는 무대에 한 음악칼럼니스트가 뚜벅뚜벅 들어와서 “이번 곡, 슈톡하우젠의 <소년의 노래>는 관객석을 둘러싼 네 대의 스피커를 통해 청취하실 ‘공간음악’입니다”라고 설명한 다음, 불이 꺼졌다. 어디에 시점을 둬야 할지, 눈을 감고 있으면 될지 고민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청중은 눈을 뜨고 어딘가에 시점을 고정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중년 남성의 재채기 소리가 공연장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 때문에 킥킥거리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려왔다. 눈앞의 무대에서 벗어나 분산된 집중을 표상하거나, 해소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무대는 청중들이 앉아있는 관객석으로 이동 ⠂확장한 셈이다.

 

13년간 이어진 ‘아르스 노바’의 마지막 곡은 오케스트라를 진중하면서도 경쾌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달바비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연주회>이다. 칠-팔중주 규모 앙상블의 ‘콘체르티노’라는 네 협주 그룹과 ‘리피에노’라는 하나의 그룹, 총 다섯 그룹으로 오케스트라를 나눠 “공간적 효과와 동시성의 원리를 구현”하는 작품이다. 송주호 음악 칼럼니스트에 따르면, “이 다섯 그룹은 갈등과 해결의 전통적인 극적 진행보다는, ‘소리’라고 하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서로 대화하고 협조한다”. 새로운 예술’(ars nova)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바쁘지만 경쾌하게 나아가라는 셈일까. 그런데도, ‘아르스 노바’의 시간과 당위를 모순어법으로 기술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는 슬픈 구석이 있다.

 

김태원기자

lemonadegogo99@gmail.com

 

(1): 데이비드 웰턴, 이희경 엮음, ‘현대 음악의 즐거움 –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10년의 기록’, 예솔. p.18

(2): 켄트 나가노, 이희경 엮음, ‘현대 음악의 즐거움 –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10년의 기록’, 예솔. p.14

(3): 조현화, ‘안녕하십니까-20170113’, 구글 문서 : https://docs.google.com/document/d/1BWpS2Bw80XmY4K2b3HetY3qJrKyncricZ1cYhBMwXoc/edit?usp=sha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