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학술·비평
2018년 11월 12일

6시간 20페이지

수업이 끝나고 들여다본 휴대폰에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는 드라마 작가였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어서 어쩐 일일까 불길한 마음이 앞섰지만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회신을 채근하는 듯해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채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 너머에서 슬픔을 애써 가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업하던 원고가 사라졌다’고 했다. 지인 중 그나마 컴퓨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내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연락한 것이었다. 작가에게 있어 비보 중의 비보인 그 사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예정된 회의를 위해 6시간 동안 작업한 20페이지 분량의 원고였다. 웹하드를 사용해 주기적으로 파일을 백업하며 작업을 했던 모양인데 총 50여 페이지의 원고 중 20페이지가 유실되었다. 새하얗게 비어있던 화면 위에 고심하며 고르고 고른 활자 씨앗을 뿌려 한나절 동안 정성껏 가꾼 4만여 글자가 한순간에 백지로 돌아가 버렸다고 하니 내 머릿속도 하얘졌다. 그야말로 공(空)으로 돌아간 6시간 20페이지가 주는 공허함에 한기마저 들었다.

 

급한 대로 PC 원격 접속을 통해 그의 컴퓨터를 뒤져보았다. 백업한 파일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기존 파일을 덮어쓰며 계속 작업을 해왔던 탓에 문서 내에서 사라진 20페이지 분량의 글들은 도저히 찾을 길이 없었다. 한나절 동안 전심전력 다 했을 결과물을 되찾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허탈함뿐이었다. 어떠한 이해관계가 없는 나도 이렇게 애통한데 당사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기성 작가의 깜냥은 가지고 있지 못한 나이지만 세상에 없던 것에서 유의미한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고통은 인지상정이라 나 역시 기기묘묘한 아픔에 가슴이 저릿했다.

 

머릿속에서 정제를 거듭한 생각을 떨리는 손끝으로 백지 위에 내려놓고, 그렇게 어렵사리 내려놓은 그것을 또 수십, 수백 번에 걸쳐 깨고 다듬어서 결국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내려놓는 지난한 여정. ‘좋은 글이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포기되는 것’이라는 어느 문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과 회한은 인간이 차마 견뎌낼 수 없어 가까스로 즐겨내고 마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또한 감히 존재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숭고한 행위인 동시에 그만큼 자신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작가의 숙명이란, 제 몸을 깎아내어 세상에 오롯이 족적을 남기는 연필의 그것과 많이도 닮아있다. 그렇게 스스로 세상의 연필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제 살점과도 같은 흑심의 궤적이 지워져버리는 ‘사태’는 작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괴로운 경험일 것이다. 더군다나 6시간 20페이지의 정제의 결과물을 되풀이해야만 하는, 창작과 자기 모작의 경계에 있는 그 이후의 시간은 그야말로 몸서리쳐지는 상심과 고뇌의 시간이 아닐까.

 

어떤 말로 위로 비슷한 것이나마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내게 그는 뜻밖에도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한 번 썼으니 두 번째는 더 잘 쓸 수 있겠지.”

그리고 소고기와 당근을 듬뿍 넣은 카레로 특별한 저녁을 해 먹은 후, 새로 세탁한 베개피로 향긋한 잠자리를 만들어 푹 자고 새벽에 일어나 다시 작업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을 위로하는 작지만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는 그의 산뜻한 각오에 내 마음도 덩달아 위안을 찾았다.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은 후에도 그의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 번 썼으니 두 번째는 더 잘 쓸 수 있겠지.’ 글 쓰는 이의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도, 다시 달려가게 만드는 것도 결국은 다시 글이었다. 단어와 문장이 만들어내는 숱한 주저와 작은 용기가 되풀이되는 ‘작가의 생’이 새삼 진중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떤 글로 채우고, 또 어떤 글로 그 삶을 써 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겪은 6시간 20페이지의 고통과 치유가 내게도 끊임없이 되풀이될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다독이는 맛있는 밥 한 끼와 모두가 잠든 새벽 분연히 일어나 그 어떤 세상도 빚어낼 수 있는 백지를 마주하는, 그 소소하지만 거대한 힘에서 나올 것이다.

 

박세원

전문사 영상원 영화과 시나리오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