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비평
2018년 10월 28일

영화의 짧은 역사와 매체의 오랜 역사

미디어고고학이란 무엇인가?

 

‘포스트(post-)’ 다음에, 무엇이 남는가?

 최근 ‘포스트-미디어 시대’를 주제로 삼은 한 학회를 다녀왔다. 발표문을 준비하는 내내 되뇌었던 질문은 과연 ‘포스트-미디어, 즉 미디어-이후에 무엇이 남는가?’였다. 나는 미래를 예견하기에는 기술사적 지식도 마술사적 육감도 없지만, 막연하게나마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던 소통의 도구로서 매체를 본다면, 과연 포스트-미디어, 즉 매체-이후가 과연 있을 것인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최소한, 영화연구에 대한 ‘담론’의 차원에서 본다면, 포스트-미디어는, 포스트-필름(post-film)이라는 이미지 성립 조건의 변화와 포스트-시네마(post-cinema)라는 매체 경험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지칭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빠른 영화, 짧은 역사

 영화학자 앙드레 바쟁은, 영화는 그 “미학적 시간의 불가사의한 가속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했다. 영화 역사의 진행 속도가 아주 빨라서 어떤 작가도 그 안에서 5년 내지 10년 이상 지속해서 그 천재성을 발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채플린을 그 예외적인 케이스로 보았다.) 다른 예술과 비교해서 빠른 이 ‘노화’는 영화가 (바쟁 스스로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기술결정론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기술적 복제로서 영화이미지가 현실에 갖는 밀착성은, 현실 역사가 시간에 따라 늙어가듯, 영화가 늙어가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한편,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고 항상 그 실험의 장이 되는 영화는 부단히 새로운 모습을 입어가게 된다.

 19세기 말 처음 영화를 향유하게 되고, 1920년대 영화가 연구대상이 되고, 20세기 후반 대학과 같은 학제를 통해 영화가 교육되는 일련의 역사 속에서, 영화는 항상 새로운 매체, 젊은 매체로 여겨졌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장의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 빨리, ‘영화-이후’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가, 특히 리얼리즘 서사영화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어떤 문화적 모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영화연구는, 영화를 서사를 구성하는 기호들의 집합으로 보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부터 훨씬 다양해지고 있다. 영화적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장치, 기술, 기능들에 관한 연구, 그리고 더 나아가 디지털 시대 영화 매체의 재료와 그 물질성에 관한 연구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대안적 미디어 연구 중 하나를 ‘미디어고고학’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미디어고고학

 그 용어가 암시하듯, 최근 ‘미디어고고학’은 지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한 방식으로서 푸코(Michel Foucault)의 고고학 개념을 기초로 삼고 있다. 흔히 사유를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장치와 기술의 흔적들을 그 ‘의미’와 상관없이 연구하는 것이다. 영화라는 미디어를 중심으로 보면, 이러한 관점은 기본적으로 영화적 서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미디어고고학이 서사를 배제한다는 것은, 미디어의 ‘역사’라는 서사에도 적용된다. 달리 말해, 매체에 대해 단일한, 즉 선형적으로 발전하는 역사모델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고학적’ 탐구 대상으로 영화 이전의 기술들을 재발견하고 연구하더라도 그것을 현재 영화에 대한 ‘기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매체를 영화의 기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그것을 현재 모습의 영화를 낳은, 오래된 것, 과거의 것, 즉 다시 오지 않을 어떤 것으로 본다는 의미다. 하지만 미디어고고학은 이제는 사라진 매체를 연구할 때, 그 안에서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찾아낸다. 즉, 죽은 기술, 잊혀진 매체가 우리가 미래에 실현할 것으로 추구하는 모습과 만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 현실에 대한 완전한 재현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이전 세대의 상상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것 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미디어고고학의 중심에는, 매체 연구가 사회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적 탐구의 대상임을 증명한 키틀러(Friedrich Kittler)이래 문화기술(cultural techniques)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펼쳐온 독일 이론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인류의 지각 경험은 문화적 기술의 기반이며, 이들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그것을 확장(extension)시켜주는 도구, 즉 매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키틀러는 인류가 추구했던 ‘기록’의 기술이 1900년을 전후로 탈-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주장했는데, 그는 현대 매체의 발전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것, 즉 의식의 개입을 차단하는 일종의 자동글쓰기가 추구되었던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인간성(의식, 기억 등)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인간의 문화기술(기억과 기록)을 확대하고자하는 과정에서 (코기토와 같은 이성으로서, 또는 교양을 가진 전인격으로서) 인간 주체는 배제되고 해체된다. 타자기, 축음기와 함께 영화는 그런 탈-인간적 자동기록 매체의 대표로서 탄생한다. 영화를 인간의 상상력, 창의성, 사유 능력을 기반으로 나타난 새로운 의미전달 도구로 보는 시각과 차별화되는 관점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굳이 미디어고고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거닝(Tom Gunning)의 초기 영화사 연구, 크래리(Jonathan Crary)의 19세기 시각문화사 연구, 그리고 60년대 이후 정신분석학에 기반한 영화 장치(cinematic apparatus) 연구도 매체 구조와 기술, 그리고 그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디어고고학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 담론 내에서 미디어고고학의 역할

  오늘날 포스트-시네마 개념은 영화의 디지털화 이후, 영화적 경험이 다양한 공간으로 확대 혹은 분산되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극장을 기준으로 관객의 경험을 통해 세팅이 되는 영화적 세계, 즉 디제시스(diegesis)에 대해서도 재설정을 요구한다. 영화전용관이라는 20세기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 컴퓨터를 비롯한 스마트 기기로, 더 나아가 사물인터넷이 활용되는 일반 가전용품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굳이 극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커튼을 내리고 나만의 영화적 세계를, 혹은 그에 상당하는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전적 의미의 영화적인 것은 이제 문학적인 감수성과 같은 감응, 회화나 조각이 지닌 순간의 이미지들에 비교될 정도로 세분화 되어 퍼져나가고, 마치 한 편의 광고처럼 초단위에서 완성되는 드라마의 형태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영화적 세계와 이미지, 그리고 관객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할 필요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의 재설정은 뉴미디어 시대에 이르러 새로이 등장한 경험으로 촉발되었다기보다, 오늘날 다양하게 확장되는 매체적 관점이 그 동안 영화적 경험 속에서 간과되어왔던 측면들을 재조명해주기 때문에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경험의 차원에서 “디지털 정보는 여전히 아날로그 인터페이스를 필요로 한다”는 로도윅(D.W. Rodowick)의 주장(The Virtual Life of Film, 160)과, 디지털 환경이 과연 경험의 차원에서 구분할 수 있는 새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라는 회의 섞인 질문들(John Belton)을 마주한다. 우리는 ‘의미’의 차원에서 디지털 이미지가 표지성(indexicality)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 왔지만, 영화 매체를 둘러싼 실천과 경험의 차원에서, 우리가 망연자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포스트-필름은 뉴미디어 기술을 반영하여 포스트-시네마 시대를 열었고, 가상현실, 증강현실, 또 사물인터넷 등으로 다양화된 인터페이스가 위협하는 것은 인간성도, 인간에 대한 개념도 아니고, 그저 20세기 영화의 규범일 뿐이다.

 

인류를 넘어 지속되는 매체 역사

 미디어고고학은 대안적 학문이다. 미디어고고학은 서사와 의미 중심의 영화연구와 진화론적 매체사연구에 ‘대하여’ 작동한다. 매체 발전론의 차원에서 죽은 매체, 잊혀진 매체를 적극적으로 다루며, 서사 구성의 차원에서 잉여 이미지, 즉 버려진 이미지, 고아된 이미지(orphaned images)를 재발견하는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역사가 짧다고 했지만, 지구나 물질의 역사를 따져보면 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매체의 재료나 물질적 구성에도 관심을 넓히면서 미디어고고학은 미디어지질학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는데, 이는 인류세(人類歲)를 넘어 미디어를 바라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논의는 점점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하는 것만 같다.)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세대, 그리고 학교로 돌아와 미디어고고학을 위치시켜보자.

 영화연구라는 학제 안에서 미디어고고학은 기술 장치와 매체 경험의 측면에 높아지는 관심사를 대변하며 동시에 문학과 같은 기존 학문 실천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영화교육이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더 분명해진다. 할리우드라는 문화산업을 바탕으로 서구 시네필의 인문학적 접근법을 학제화함으로써 영화연구(Cinema Studies)를 주도했던 미국에서도, 서사비판을 중심으로 하는 텍스트 중심 영화연구는 (영문과, 독문과, 불문과 등의) 문학학과와 (동아시아학과, 미국학과 등) 지역학과 내 문화연구의 일환으로 유입되어 간다. 이는 오늘날 한국의 주요 인문학과들에서 영화 텍스트를 활용한 수업을 개설하고 있는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영화학과는 주로 영화와 미디어과(film and media studies)라는 이름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학문으로 확장되어 왔다. 영화매체는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 있으며, 그곳에서 기술과 상상력이, 장치와 인간이 어우러진다.

 여기서 미디어고고학적 연구는, 학문의 영역에서 꽤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의미에 대한 연구와 균형을 맞추는 추가 되고 있다.

 영화를 진지하게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그 두 흐름을 만나게 될 것은 분명하다.  

 

 

남수영

영상원 영상이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