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학술·비평
2018년 10월 14일

오정희와 나

작가 ‘오정희’ 를 말할 때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년이다. 어린 아이부터 중년 여성까지, 오정희는 작가 자신의 나이가 변해감에 따라 여러 여성 화자를 내세운다. 화자와 작가의 나이가 변하면서 소설이 안고 있는 문제의식과 딜레마도 달라진다. 그 중에서도 내게 가장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중국인 거리> 와 <유년의 뜰> 에서 오정희가 보여주었던 유년의 모습이다.  

유년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방정환이 ‘어린이’ 라는 단어를 만든 이래로, 사람들에게 유년기는 보호받아야 할 어떤 순수처럼 여겨졌다. 오정희는 소설을 통해 그런 순수는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다만 환상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오정희가 그린 유년기의 화자들은 어린이가 아닌,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어린 인간으로서 존재한다. 어린 아이 특유의 가감 없는 시선은 동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잔인한 삶의 일면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데 쓰인다. <중국인 거리> 에서 치옥이 양갈보가 될 거라며 선언하는 장면이 그렇다.

어떤 트라우마가 인생에 걸쳐 강하게 자리잡는 시기가 있다면 유년기라고 생각한다. 유년기의 사람들은 무의식을 학습하며 해결되지 않을 욕망과 두려움을 배운다. 오정희 소설 속 화자의 욕망은 여러 장치를 통해 표출된다. 꿈, 상징화 된 사물, 표상, 외출 등 대부분 욕망과 두려움은 고도로 상징화 되어 있다. 내면의 반대를 바깥이라고 한다면, ‘바깥’ 으로의 욕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한다. 그 욕망을 드러내는 행동 자체도 감춰져 있는데, 오정희 소설 속 유년의 화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조금 더 날 것의 형태로 드러난다. 욕망은 조금 더 신체적, 물리적으로 변한다. <유년의 뜰> 의 화자가 부리는 식탐이 그렇고, <중국인 거리>에서 화자와 주변인물이 내비치는 성적인 호기심들이 그렇다. 유년기의 인물들은 조금 더 게걸스럽고, 조금 더 가감 없으며, 조금 더 솔직하다. 그러나 욕망보다도 더 징그러운 것은, 그런 유년기의 화자를 둘러싼 주위 환경들이다.

글이 쓰인 당시보다도 현대의 환경은 나아졌다. 당장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현대 사회에선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정희의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공포가 시대상보다는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징그러운 일이며 생존을 견딘 사람들은 또 얼마만큼 징그러워질 수 있는지 실존 그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년의 눈이기에, 그 실존의 실재를 정통으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유년기의 화자는 세계를 피부로 겪어 나가며 조금씩 그 질서 안으로 편입하게 된다. 집을 나갔던 아버지는 돌아와야 하고 소녀는 초조를 맞아야 한다.

이상한 것은 그 유년기의 끝을 고하는 신호들을 읽는 순간, 꿈에서 깬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세계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감 대신,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 더 이상 음험하거나 징그러운 모습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며, 세계의 질서 안으로 편입해 그 일부가 될 거라는 신호. 그 신호를 받는 순간 나는 오정희가 그려냈던, 음험할지언정 비밀이 있고, 숨겨진 페이지 속엔 늙은 남자가 모는 솜사탕 트럭이 존재하는 유년이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이야기들에 가장 크게 공감하고, 매혹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유년기를 겪어왔고, 이제는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첫 소설집 <불의 강> 에서 등장하는 20대 정도의 여성 화자와는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이후 소설 속 나잇대는 겪어보지 않았기에 공감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경험했으면서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선에 있는 화자와 읽는 ‘나’ 가 제대로 교감했을 때, 나는 거울 맞은편에 있는 유년기의 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오정희가 그려낸 유년에 공감한 것은 현재의 나이면서도 과거의 나, 내가 들여다보지 못한 나이기도 하다.  

고백하자면  내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것은 ‘바깥’ 이었다. 그러나 오정희의 소설을 읽으며, 한 인간의 내면이 이렇게 지독하게 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깨진 거울 안에는 어린 아이가 있고 ‘바깥’의 반대가 있고 내면이 있다. 오정희의 소설은 그 것이 결코 좋은 말로 포장될 수 없는 것들이란 것을 상기시켜준다. 날 선 문장에 베여 상처를 자주 입는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날 선 유년기를, 지독한 내면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살아간다는 사실이 내게 기묘한 안도감을 준다.

내게 유년기의 화자들은 어쩐지 그 모든 것의 상징 같아 보인다.

 

익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