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학술·비평
2018년 10월 3일

Into the woods

1933년, 뉴욕 지역에서 미술품 도난사건이 잦아지자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독일 셰퍼드 한 마리를 고용했다. 소정의 박물관 매니지먼트 과정을 마치고 업무에 투입된 경비견 돈(Don)은 낮에는 미술관 뒷마당에서 낮잠을 자고, 오후 6시가 되면 미술관 내부를 활보하며 경계근무를 섰다. 어찌나 경계심이 투철한지 미술관 2층의 마야 조각상을 보고도 짖어댈 정도였다.

 한 달이 지났을까, 돈의 역량에 의문을 표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 시작했다. “토끼처럼 온순해진 경찰견”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는 돈이 너무도 ‘스윗하고 친절해’져 버렸다고 전했고, 다른 기사는 돈이 야생성을 잃은 이유를 ‘미학적인 환경’에서 찾기도 했다.

 예술대학이라는 ’미학적인 환경’에서 ‘야생성’을 잃어가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들개’ 같다거나, ‘야성적’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어온 나는 이곳에 입학하여 말하자면 다른 야생동물들과 접촉하고, 이 어쩔줄 모르겠는 야생성을 한층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만성피로와 권태, 존엄성 상실의 기운으로 구석구석 적셔져 있는 일반 사회공간과 달리, 이곳은 치외법권까지는 아니더라도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특별구역과도 같은 곳일 줄로 알았다.

 우울하고 혼란했던 1학기를 통과하며 내 생각은 상당 부분 교정되었다. 돈이 미술관이라는 제도 속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았다면, 나는 대학이라는 제도 속에서 이상한 모양으로 찌그러지고 있었다. 과장을 덧붙이자면 내가 파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돌고래가 아니라 그저 조류에 무력하게 휩쓸리는 플랑크톤이자, 동료들과 기민하게 협동하여 물소를 사냥하는 사자이기 보다는 헤드라이트에 고정된 사슴 혹은 길 잃은 어린 양에 가까운 듯 했다.

 다시 말해 이곳은 ‘야생동물 보호구역’이 아니라, 위로부터 짓누르는 시스템과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는 혈기왕성한 에너지를 조화시키는 법을 터득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고민을 깊이 해본 적이 없었다. 예컨대 군대는 제도화된 야생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예술에 있어서 제도와 야생을 어떻게 화해시키면 좋단 말인가. 나는 못할 것 같은데? 

 지난 여름방학을 이용해 생각을 정리했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닿았다.

 먼저,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는 좋은 모델이 된다. 라벨의 아다지오 아사이를 연주하고 있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몸에서 마치 한마리의 야생동물 같은 기운이 풍겨나 완전히 매료되었다. 고전음악 연주자의 몸에서 야생의 기운이 풍겨나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다년간 인위적인 훈련과 연습의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서는 주로 성실함이랄지, 엄격함이랄지, 깊은 전통과의 접속에서 오는 권위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리모는 마치 야생 늑대처럼 야성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연주가 투박하다던가, 어딘가 세련미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트뤼포의 <야생의 아이>와 달리 그리모는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파리음악원이라는 제도와 불화를 일으키기는 커녕 수석으로 졸업했다.

 다음으로, 역사 속 이행기의 철학자들이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18세기 이행기의 칸트, 19세기 이행기의 맑스가 남긴 글에서는 진한 땀냄새가 난다. 20세기 이행기의 프로이트 또한 그 정도가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비슷하다. 이행기 사상가의 글은 철저히 이성의 지도를 받아 작성한 것임에도 동물적인 면이 있다. 물론 내가 이들의 글에서 느끼는 야생성은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1차원적 야생성은 아니고 ‘감히 알려고 덤벼’ (sapere aude) 스스로 자가발전 해낸 내적 자유와 용기로부터 나오는 복합차원의 야생성이다. (몰아쳐 달리는 사냥질(馳騁畋獵)의 아드레날린 러쉬(心發狂)로서의 야생성은 이행기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정점을 향해 무르익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돈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돈의 야생성을 되살리기 위해 미술관 직원들이 고심 중이라는 소식 이후로 자료가 발견된 것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쪼록 자료를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조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