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8년 9월 25일

돌곶이에서 추석을 맞다

나는 명절이 싫다.

 

 정확히 말하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엮인 사람들이 화목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한데 모이는 모습이 보기 싫다. 지극히 이질적이고 불쾌하다.

 그것은 내가 단 한 번도 ‘나’의 가족을 화목한 군상으로 여겨본 적이 없기 때문임에도 있을 테다. 하지만 명절이 더욱 싫은 이유는 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친가에 내려가지 않기 전까지 군말 없이 지켜봐야만 했던 풍경, 그 기억 속에 있다.  TV 브라운관을 손가락질하며 유별난 이유도 없이 거슬리게 웃어댔던 작은 아빠, 종일 지린내를 풍기며 괜히 윽박질러대던 친할아버지, 죄인인 마냥 쪼그려 앉아 쥐새끼 같은 눈빛으로 눈치를 보던 삼촌, 그리고 그 사이를 천진하게 뛰어다니던 다섯 살배기 사촌 남동생. 내 기억 속 작은 방에 여자들은 없다. 그녀들은 모두 좁디좁은 부엌 한 켠에 끼어 서서 기름 쩐내를 한 몸에 받아내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들은 명절 준비를 도맡아 했다.

 

 명절 준비는 친가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날 밤부터 주방에서 보글보글 끓던 커다란 냄비를 기억한다. 어느 해에는 갈비찜, 어느 해에는 육개장 어느 해에는 한 소쿠리 가득 소담하게 담긴 잡채였다.  내가 좀 더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기 전이었던가, 그즈음에 우리 어머니는 시댁에 예쁨 받아볼 요량으로(당신은 극구 부인하시겠지만) 손수 케이크를 구워간 적이 있더랬다. 그마저도 아버지라는 사람이 떨어뜨려 버린 탓에 ‘모양이 이게 뭐냐?’는 시어머니의 타박을 받고는 그만이었다.

 여자들은 나와 네 살 터울 위 언니까지 동그랗고 작은 식탁에 비좁게 끼어 앉았다. 그마저도 몇 명은 나중에 먹겠다며 빠진 상황이었다. 남자들은 커다랗고 네모난 상을 여자들이 옮겨 저들 앞에 들이밀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 않았다. 비로소 수저까지 모두 준비되고 나서야 어험, 어험 하는 헛기침을 몇 차례 뱉고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시작하기 전에는 친할아버지의 장황한 연설을 들어야했다. 연설이 끝나갈 때쯤에는 식욕이 뚝 떨어져 있곤 했다. 

 드디어 상을 들기 시작하면 작은 아버지의 반찬 투정이 빠지지 않았다. 매년 그랬다. 그것도 우리 어머니가 며칠간 준비해 온 반찬에만 그랬다. ‘형수님, 좀 짜네요 이게..’ ‘이건 또 너무 다네, 형수님도 이제 늙었나 봐.’ 친할머니네 밥은 질다는 핑계로 두 끼를 먹지 않고 집에 돌아가자고 우겼다. 사실은 같은 반찬으로 절대 두 끼를 들지 않는 ‘우리’ 집안 남자들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우리 어머니는 국이라도 새로 끓여야 했고, 나는 저녁 늦게까지 그들의 시중을 드는 어머니를 어떻게 해서든 구출해내고 싶었다.

 

 명절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항상 우울했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뵌 친조부모님께서 속상하시겠다고 지껄였다. 어머니는 지쳐 잠이 드신 지 오래였다.

 

 화목한 가족상에 대한 알러지가 생긴 까닭에는 여러 다른 이유가 있을 테다. 허나, 명절이 싫어진 이유는 이제는 갈 일도 없는 친가의 기억 속에 모두 남아 있다. 이번 추석에 집에 내려가지 않는다는 고백에 동기들은 뜻 없이 순수하고 맑은 얼굴로 나를 위로했다. 고마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오롯이 나를 위한 행위를 그들은 어떤 희생 정도로 여기고 있을까 싶어서.

 

공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