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2018년 9월 16일

의릉, 우리가 더 있어도 괜찮을까요?

1960년대 중앙정보부 들어서며 파괴, 능역 수복도 어려워

국가기관에 의한 문화재 훼손 없어야

 

우리학교 석관동캠퍼스 옆 서울 의릉의 훼손이 심각하다. 조선 제20대 왕 경종과 왕비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은 1960년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청사가 들어서며 파괴되었다. 중앙정보부가 서울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며 일부는 복원되었지만, 능역(왕릉의 터전)의 온전한 수복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서울 의릉 전경, 정세미 기자

 

의릉,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

1730년 음력 6월 29일 선의왕후가 승하했다. 선의왕후는 경종의 두 번째 비이자 어유구의 딸이다. 16세에 왕비로 책봉됐으나, 경종이 즉위한 지 오래지 않아 급사하여 20세에 왕대비가 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당쟁 가운데 살다 경희궁 어조당에서 생을 마감했다.

 

선의왕후는 경종이 안장된 의릉에 부장됐다. 국장은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가 지냈다. 영조는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하고 우의정 이집 등에 의례를 맡겼다. 일찍이 경종을 위해 조성된 의릉은 선의왕후의 봉분이 더해져 동원상하릉(좌우로 이웃하지 않고 앞뒤로 세운 능)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선의왕후국장도감의궤 반차도 세부, 국립중앙박물관

 

의릉은 천장산을 등지고 중랑천을 앞으로 두어 배산임수를 갖췄다. 천장산은 한북정맥과 북한산을 잇는다. 의릉을 비롯한 조선왕릉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으로 나뉜다. 왕릉을 돌보는 관리가 머무는 재실과 진입공간은 산 자의 공간이다. 능역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금천교를 건너 잡귀를 쫓는 홍살문을 지나면 선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난다. 홍살문을 따라 난 향어로 좌우로는 수복방과 수라간이 있다. 모두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제향은 향어로 끝 정자각에서 치른다.

 

언덕 위 봉분은 죽은 자의 공간이다. 봉분은 돌로 된 양과 호랑이가 수호하고 있다. 양은 사악한 기운을 막는 동물로 여겨졌다. 의릉의 호랑이 석상은 다른 능과 달리 익살스럽고 역동적으로 표현됐다. 그 앞으로는 망주석과 문인석, 무인석이 나란히 서 있다. 1730년대에 조성된 의릉과 부속 건물은 1900년대 초까지 조선왕조의 의례에 따라 관리됐다. 조선왕조는 이를 『선의왕후국장도감의궤』 등에 상세히 기록했다.

 

중앙정보부에 파괴되다

의릉은 그러나 1962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능역에 자리 잡으며 철저히 파괴되었다. “의릉만큼 훼손이 심하였던 곳도 보기 힘들다”. 매주 토요일 의릉에서 문화해설을 진행하는 자원봉사자 이호선 씨의 말이다. 당시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는 청사 이전을 위해 능역 131,401평을 무상 임대했다. 중앙정보부 청사는 1966년에 완공되어 자료 수집·보관, 교육·훈련, 해외 업무 기능을 수행했다.

 

중앙정보부는 청사와 더불어 강당, 운동장, 인공연못 등을 지었다. 1967년 찍힌 항공사진을 보면 능역 오른쪽에 강당과 운동장이 들어서 재실, 금천교, 주변 수목이 일부 훼손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재실은 1969년 철거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영친왕 봉분으로 옮겨졌다. 1972년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 인공연못인 ‘양지못’이 조성됐는데, 이때 금천교가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촬영한 항공사진에서는 향어로, 수복방, 수라간이 훼손되어 사라졌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원훈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양지못과 음지못은 이를 딴 이름이다. 양지못은 능역으로 복원되어 사라졌지만, 음지못은 우리학교 석관동캠퍼스 천장관 앞에 아직 남아있다.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며 의릉은 왕릉으로서의 위엄을 상실했다. 중앙정보부는 능역에 외래종을 포함한 꽃과 나무를 심었다. 향어로가 있던 곳은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 정자각 주변에 엉뚱한 고려시대 탑까지 들어서며 의릉은 중앙정보부의 정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늘날 의릉이 되기까지

추석을 맞는 의릉은 벌초가 한창이다. 오늘날 의릉은 본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중앙정보부 건물은 대부분 헐렸고, 운동장과 인공 연못도 사라졌다. 비록 우리학교 석관동캠퍼스와 주택가로 둘러싸였지만, 과거에 비하면 상전벽해다.

 

의릉은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한 중앙정보부가 서울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며 복원되기 시작했다. 국가정보원은 1996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정부에 토지를 반납했다. 이때 우리학교는 일부 토지의 관리 권한을 위임받아 석관동캠퍼스를 준공했다. 문화재청은 2002년에야 의릉 능역을 환수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은 2003년 의릉 일대에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시행했다. 당시 의릉은 정자각과 비각만이 남아 있어, 발굴조사단은 이를 근거로 없어진 건물터를 찾았다. 수복방과 수라간 등의 터는 확인됐다. 재실 터로 추정되는 곳은 전통예술고등학교 석관동 교사로 쓰이다 한화제약 사옥이 들어서서 현재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능역 복원은 아직 진행 중이다. 능역을 환수하여 중앙정보부 건물을 철거하고, 훼손된 삼림까지 복구해야 하는 탓이다. 과거 의릉 능역은 우리학교 석관동캠퍼스 학교본부, 미술원·전통예술원과 인근 주택가, 시공 중인 래미안아트리치 아파트 단지까지 닿았을 거라 추정된다. 미술원·전통예술원은 우리학교의 토지 관리 권한이 단계적으로 종료되어 곧 철거된다. 비교적 복원이 쉬운 홍살문과 금천교도 제 모습을 찾았다.

 

다만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조인했던 중앙정보부 강당은 철거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 최후의 유산이 될 이 강당은 복원공사를 앞두고 있다.

서울 의릉 전경

서울 의릉 전경, 정세미 기자

 

문화재 훼손에 대하여

문화재가 훼손되는 것이 의릉만의 일은 아니다. 경복궁은 조선왕조를 거치며 수차례 화마에 휩싸였고, 일제강점기엔 조선총독부 건물에 짓눌리는 수모를 겪었다. 같은 시기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정원으로 기능했다. 얼마 전 브라질에서는 국립박물관이 전소해 문화재 약 2천만 점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모든 것은 시간이 흐르며 닳아 없어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국가기관이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의릉 근처에 위치한 태릉은 육군사관학교가 들어서며 능역이 크게 훼손되었다. 정부는 조선왕릉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며 능역 복원을 약속했으나 시행되지 않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 사냥 암각화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 역시 비슷한 처지다.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 사연댐이 완공된 후인 1971년 댐 내부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보존방법을 놓고 갈등을 벌인지 50년째, 반구대 암각화는 매년 6~8개월 동안 물에 잠겨있다.

 

문화재청은 2009년 유네스코에 제출한 복원안을 근거로 조선왕릉 전반에 복원사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조선왕릉 의릉관리소 담당 주무관은 그러나 “의릉의 능역이 이미 사유지가 되어 온전한 환수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했다. 다만 “문화재청이 조선왕릉에 대한 대대적 발굴조사를 계획하고 있고, 여기에 의릉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수복방과 수라간도 복원될 예정이다.

 

우리학교의 토지 관리 권한은 2020년 종료된다. 학교 부지와 건물은 순차적으로 문화재청에 위임된다. 중앙정보부 건물은 모두 철거되고, 7.4 남북 공동 성명을 조인한 강당은 수리를 거쳐 보존된다. 그러나 석관동 일대의 재개발 압력이 거세지고, 우리학교 통합 캠퍼스 추진이 더뎌지는 가운데 의릉의 시름은 날로 깊어져 간다.

 

최민기 기자

choiminki1997@gmail.com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6』,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오승용, “돌아온 산, 남산: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되다”, 한겨레21,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