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2018년 9월 1일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집회 열려

안희정 전 충남지사 무죄판결 후 첫 도심집회

여성운동계 인사 연단 올라 일제히 사법부 규탄

 

하나경 기자

 

법원의 성편파 판결을 규탄하며 시민들이 일제히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지난 8월 18일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못살겠다 박살내자’ 집회가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렸다. 이번 집회는 340여 개 여성·노동·시민단체가 조직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하 미투시민행동)’이 주최했다. 당초 집회는 25일로 예정됐으나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무죄를 선고받은 데 항의해 앞당겨졌다. 참여자들은 연단에 올라 사법부의 ‘성편파 판결’을 규탄하고, 광화문 일대를 행진했다. 이날 집회는 주최 측 추산 2만 명이 모였다.

 

앞서 안 전 지사는 전 수행비서 김지은 씨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 3월 김 씨가 JTBC 뉴스룸 인터뷰를 통해 안 전 지사에게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과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이후다. 당시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던 안 전 지사는 충남지사직을 사퇴했고, 당에서 출당·제명당했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5개월여, 법원은 1심에서 안 전 지사의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와 김 씨가 ‘위력관계’에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간음과 추행 상황에서 업무상 위력의 행사가 없었다”며 “피해자의 내심이나 심리상태를 떠나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어떤 위력을 행사했다고 볼만한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김 씨를 비롯한 시민단체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김 씨는 판결 당일 입장문을 발표해 “어쩌면 예고되었던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며 “권력자의 권력형 성폭력이 법에 의해 정당하게 심판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 또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판례 △피해자 김 씨의 진술 배척 △검찰 측 피해자 심리분석 심리(審理) 미진 등을 이유로 20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하나경 기자

 

집회는 ‘안희정은 유죄다. 사법부도 유죄다’라고 외치며 재판부의 이러한 판결을 규탄했다. 주최 측은 집회를 크게 둘로 나눴다. 1부 모두발언은 여성 운동계 여러 인사가 마이크를 잡았고, 피해자 김 씨의 입장문을 대독했다. 집회참여자들은 광화문 일대를 행진하고, ‘편파판결’, ‘피해자다움’ 등이 쓰인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행진이 끝난 후 이들은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다시 모여 2부 자유발언을 이어나간 뒤 해산했다.

 

집회의 모두발언에서 단상에 오른 여성학자 권김현영 씨는 “재판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피해자만을 의심했다. 숙소를 예약하고 메뉴를 정하는 수행비서의 업무를 피해자답지 않다고 의심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여자가 수행비서인 것 자체가 예외적인 일이다”라며 “일터에서 최초가 된 여성들은 반드시 일을 잘해야 한다. 여성에게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피해자는 오늘 무슨 일을 겪어도 내일을 살기 위해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었다”며 “[이를 고려하지 않는] 재판부가 우리 사회의 합리적 이성을 대변할 수 있겠냐”고 주장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도 이날 집회에 참여했다. 최 씨는 “이번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김 씨를 지지하는 이들의 연대를 호소했다. 더불어 마야 앤절로의 시 <그래도 나는 일어서리라>를 인용하여 “당신은 나에 대해서 역사에 써놓을 수도 있겠지. 매섭고 비틀린 거짓말로. 그야말로 나를 땅에 밟아 뭉갤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흙먼지처럼, 나는 일어서리라”라며 발언을 마쳤다. 노령의 시인은 10억 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중에 있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사람이 먼저라는 이 정부에서 여성은 사람이 아니냐”라며 “국민의 인권을 수호하는 경찰과 검찰이 실현하는 정의가 여성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고 재판부의 판결을 비판했다.

 

이날 집회에서는 김 씨의 입장문이 참여자들에 전해지기도 했다. 김 씨를 대신해 재판장에 섰던 정혜선 변호사가 집회에 나선 것이다. 김 씨는 정 변호사를 통해 “지난 3월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며 “[재판부는] 왜 제게는 물으시고, 가해자에게는 묻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했다. 이어 “저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노동자이자, 평범한 시민일 뿐”이라며 앞으로 진행될 항소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달라 호소했다.

 

집회참여자들은 광화문 일대를 행진하며 주말 광장에 나온 시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여기 있다, 너를 위해 여기 있다”, “피해자가 왜 꽃뱀으로 불리는가” 등의 피켓을 든 이들은 서울역사박물관을 출발해 세종대로를 따라 도심을 가로질렀다. 행진을 마친 이들은 ‘편파수사’, ‘편파판결’, ‘피해자다움’, ‘강간문화’, ‘성폭력’ 등의 문구가 쓰인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일시에 스마트폰 손전등을 켜 사법부의 판결에 분노한다는 횃불 퍼포먼스도 선보였다.

 

집회는 자유발언이 이어지며 늦은 시간까지 계속됐다. 성폭력 피해자라 밝힌 한 집회참여자는 “약자가 목소리 낼 수 있는 사회로 변하는가 싶어 미투 운동을 지켜보며 마음이 아프기도 하면서 희망을 품기도 했다”며 “더이상 피해자들이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전했다.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은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싸워올 동안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던 사람들이 미투 운동을 하지 않느냐며 우리의 피해 사실을 전시할 것을 요구한다”며 “어쩌면 우리는 이제부터 제대로 된 싸움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발언했다.

 

이날 집회는 남성과 중장년층의 참여도 눈에 띄었다. 생물학적 여성만이 참가할 수 있었던 혜화역 시위와 달리 사법부를 불신하고 그 판결을 규탄하는 데 집회의 초점이 맞춰진 까닭이다.

 

집회를 주도한 미투시민행동은 안 전 지사 재판을 비롯한 각계의 미투 운동을 계속해서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지난 23일 고은 시인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공동대응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여는 등 발 빠른 모양새다.

 

미투 운동을 위시한 여성운동이 이날 집회처럼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다양한 계층을 포섭해 나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최민기 기자

choiminki1997@gmail.com

취재도움=이도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