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비평
2018년 7월 16일

철학자 스탠리 카벨 부고

시계視界의 시계市界에서 시계時計 맞추기

 

지난 6월 19일 철학자 스탠리 카벨(Stanley Louis Cavell, 1926~2018)이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카벨은 1963년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존 랭쇼 오스틴, 하이데거의 사상을 기반으로 윤리학, 미학, 그리고 일상 언어 철학의 장에서 주로 활동했으나, 특정 학파에 속한 학자는 아니었다. NYR Daily1)는 카벨에 대해 “그는 철학자이기 전에 재즈 뮤지션이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음악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는 독특한 학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카벨의 관심은 광범위했다. 그는 문학, 오페라, 영화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특히 그가 영화학에 끼친 영향은 질 들뢰즈가 저서 [시네마]를 통해 불러온 영화 이론의 새로운 가능성에 비견할 정도로 중대하다.

 

視界, 눈에 비치는 세계

스탠리 카벨의 언어 철학, 영화-철학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시금 보이게 만들기 위한 시도이다. 카벨이 [학교 바깥의 테마들 Themes Out of School (1984)]에서 쓴 한 대목은 그의 영화-철학이 겨냥하는 주제를 명시한다. “인간의 자세와 몸짓에는 시적임, 명료함이 존재한다. 다른 예술은 여기서 일상성의 시적인 부분에 빠져들어 버리는 반면, 영화는 이를 민주화한다”. 여기서 연상되는 카벨의 철학적 배경에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함과 익숙함 때문에 숨겨져 있다”라며 ‘일상성’을 강조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시드니 대학의 데이비드 맥아더(David Macarthur) 교수는 학술지 [영화-철학 Film-Philosophy]의 2014년도 스탠리 카벨 특집호에서 ‘일상성’과 ‘일상 언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에 대한 시각과 이어지며 기본적으로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일상성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것들에 대한 파괴적인 회의론자와 도덕적 완벽주의자, 그리고 형이상학자의 방법을 따라가는 엄격한 자각이 필요하다.” 카벨의 첫 번째 책인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을 의미해야 하는가 Must We Mean What We Say? (2002)]와 카벨의 주저로 꼽히는 [이성의 주장 The Claim of Reason: Wittgenstein, Skepticism, Morality, and Tragedy (1999)]에서 비트겐슈타인을 독해한 것, 그리고 셰익스피어에 관한 후기 저작을 통해 ‘회의주의와 도덕적 완벽주의가 문화에서 발현하는 방식’을 규명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카벨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회의주의’, ‘도덕적 완벽주의’란 무엇일까? 카벨은 도덕적 완벽주의에 관한 학부생의 질문에 “철학이 우리의 삶의 방식과 관계 맺기를 원했던 것, 보다 더 엄격하게는 철학 그 자체가 삶의 방식인 것”이라고 답하기는 했지만, 명확한 정의나 이론을 내놓은 적은 없었다. 다만 카벨의 회의주의는 영화에 대한 사고를 거쳐, “영화는 회의론의 움직이는 영상이다” 같은 문장으로 나타난다. ‘눈에 비치는 세계는 정말 세계 그 자체인가’ 라는 의심을 영화는 명료하게, “세계의 연속적이고 자동적인 영사”를 통해 해결한다. 그러나 카메라 뒤에서 세계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는 그 세계 속에 있지 않다. [눈에 비치는 세계]의 역자 개요에 따르면, “‘세계 그 자체’라는 것은 오로지 스크린 위에서 ‘보는’ 것이 가능한 세계”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서만 세계의 현실을 믿을 수 있는 것, 역으로 말하면 실생활에 있어서는 항상 (세계는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회의론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市界, 말들의 도시들

하지만 카벨의 회의주의는 영화의 사진적 존재론 또는 영화의 지표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카벨이 논의하는 영화는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의 할리우드 유성 영화와 몇 가지 모던 시네마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카벨은 앙드레 바쟁 같은 평론가가 리얼리티 그 자체에 대한 욕망에 따라 출현했다고 지적한 ‘완전 영화’, 곧 ‘초기 영화’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카벨의 관심사가 후기에는 오페라로 이동한 점도 위와 같은 설명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유성 영화와 오페라 사이를 연결 짓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찬양, 나아가 ‘말’이다. 따라서 [말들의 도시들 Cities of Words : Pedagogical Letters on a Register of the Moral Life (2005)]을 통해서 카벨의 회의주의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 출판부의 서평을 옮기자면, “일상 언어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는 ‘미리 주어진 규칙들의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카벨에게 어떤 ‘규칙’이나 ‘미리 주어진 이상’ 같은 것은 언어를 포함한 우리의 판단과 그에 반응하는 세계 사이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나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카벨의 회의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는 하이데거의 회의주의적 자아론, ‘나는, 내가 나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내가 되어버릴 무언가이다’에 있다.

 

카벨에게 자아란, 언제나 자신의 것임과 동시에 절대 소유될 수 없는 자아, 이로 인해 언제나 발견되어야 하는 자아이자, 도덕적 완벽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서평의 말미에는 할리우드 ‘재혼 코미디’, ‘미지의 여인의 멜로드라마’에 대한 카벨의 관심을 관통하는 대목이 담겨있다. <지금, 여행 Now, Voyager>은 베티 데이비스와 그의 정신분석가가 나오는 영화인데, 여기서 정신분석가는 베티 데이비스를 가까이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몇 달 전 세계에 관심 없던 그 여자가 맞나요?”. 카벨이 쓰기를, “그녀는 대답한다. 단순하게, 하지만 베티 데이비스적인 미스테리와 함께, “아니오”라고. 결혼 생활에 나름 적응하는 듯한 커플로 보이는 이 둘이 서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부여된 여러 이름과 레이블은 그녀가 누구인지와 하등 상관 없는 것들이다”.

 

時計, 말의 미래, 영화와 포스트 매체

마찬가지로 카벨의 관점에서 매체는 예술에게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바뀌어 가는, 미학적 창작의 물질인 동시에 예술 행위의 결과로, 매체의 창조는 곧 ‘자동기법(automatism)’의 창조이다. 자동기법은 매체의 전통적인 물직적, 기법적 구성요소 뿐 아니라 특정 예술작품을 조직하는 형태와 장르, 규칙 또한 포함한다. 카벨은 종종 매체(media)를 복수형(medium)으로 말하는데, 매체는 단조로운 실체나 동일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단조로운 실체인지를 묻는 정신분석가의 질문에 베티 데이비스가 “아니오”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카벨의 자동기법이라는 개념은 매체의 물질적, 기술적 구성요소들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미술평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를 비롯한 여러 ‘포스트-매체’ 이론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는 198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사람의 일생 이상으로 지속되지는 못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삶과 영화의 역사가 겹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영화 감독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쿠바의 영화 평론가 질베르토 페레즈, 일본의 영화 감독 마츠모토 토시오 등 영화의 역사와 함께 살다가 2010년대에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명단에 스탠리 카벨이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와 그 매체에 대한 이해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에게 향수나 비애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각자의 방법으로 예시(豫示)했다. ‘20세기라는 불행 뒤에 영화는 자신의 거울을 깨뜨릴 것’이라고.

 

 

김태원 기자

lemonadegogo99@gmail.com

 

1)NYR Daily 2018 6월 20일 ‘Stanley Cavell, 1926-2018’ – Christopher Benf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