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비평
2018년 6월 12일

{시간이 없다}, 무너진 신화로 표백된 고유의 시간

한 남자의 시간은 ‘순교자’가 된 자신의 동상에 박제되었다. 2018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시간이 없다>(So Little Time, 라비 무르에 연출)는 가상 인물 ‘디브 알 아스마르’의 시간을 좇는다. 앞서 선보인 렉처 퍼포먼스들과 비교했을 때, 보다 픽션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작품이다. 공연이 시작되자 조명은 프로시니엄 극장처럼 무대만을 밝힌다. 중앙에 놓인 테이블 왼편은 직사각형으로 뚫린 채 수조가 그 아래를 받치고 있으며, 퍼포머인 리나 마지달리나가 곧 모습을 드러낸다. 리나는 디브의 연대기를 진술하면서 수조 속에 퍼포머 자신의 개인사가 담긴 일상 사진들을 침수시킨다. <시간이 없다>는 주인공의 첫 실종 이후부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로써 ‘디브’는 실체 없는 타자로서 우리 앞에 소개된다. 그는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 무장투쟁에 합류했다가 1988년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3년 만에 시체로 돌아왔다.

 

광장에 결집한 군중들은 종파와 계층에 상관없이 이 순교자의 탄생을 기렸고, 이듬해 그를 칭송하기 위해 동상을 세운다. 설치물은 디브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단 어떤 인물이든 기입될 수 있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서 있다. 아랍 공동체의 빛나는 태양이 된 동상은 자신이 속한 공간마저 잠식해 이름을 ‘순교자 디브 알 아스마르’ 광장으로 바꿔놓았고, 사람들의 일상으로까지 침투해 시민들을 안내하는 지리적 지표로 기능했다. 그런데 디브가 생존 포로로 귀환하면서, 땅에 묻힌 시신은 그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이 순교자의 탄생에 열광했던 그 누구도 디브의 실존을 파악하지 못했다. 군중은 기쁨과 실망이 뒤섞인 감정에 휩싸였다가, 대규모 집회라는 집단의례를 거쳐 다시 승리감을 회복한다. 살아 돌아온 디브는 자신의 ‘죽음’을 기린 동상 앞에서 분열하는데, 순교자로서의 자신을 상상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신화의 주인공—유령이 된다. 이 인물은 3부로 나뉘는 서로 다른 형식 안에서, 혹은 서사 내부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디브는 어느 아티스트의 제안으로 미술관 안에서 ‘살아있는 동상’이 되기도 한다. 죽은 이에서 산 자가 되었음에도 이처럼 자신을 박제하길 반복하며 생애 최후까지 거대한 가치에 투신한다. 그는 늘 ‘최초’가 되길 갈망하지만 동상은 수백 개가 복제되어 도시 곳곳에 세워졌다. 디브는 원본의 가치를 무화하는 복제된 이미지의 시간 속에 갇힌다. 매일 미술관을 찾아온 여인과 눈을 맞추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응시가 중지되면서 그가 눈물을 흘린 순간이 있다. 그때 비로소 공공 기억물이 아닌 개인의 역사로 귀환해 미술관이라는 제도를 잠시 탈출한다. 그러나 결혼과 개종이라는 제도를 또다시 통과함에 따라 종교적 체험이 선사하는 장엄함과 광휘에 다시 사로잡힌다. 이 구조의 반복 끝에 디브는 주검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린다. 인물의 최후는 갖가지 정파, 종교, 국가의 입장에 따라 해체되어 실체 없는 소문들로 조작된다.

 

퍼포머에 의해 디브는 ‘그’ 또는 ‘나’로 말해지는데, 이 도정에서 사진 잉크는 모두 용해되며 리나의 개인사는 말끔히 표백된다. 리나는 사라져버린 시간을 애도하듯 검정 의상을 입고서 물에 잠긴 사진들을 꺼내 말린다. 조각난 채 비뚤게 이어붙인 사진, 즉 텅 빈 현실들은 3부에 이르러 리나의 얼굴—‘나’로 분한 캐릭터—픽션을 덧입는다. 개인의 역사가 사라진 스크린 위를 가상이 덮는다. 미술관이라는 공간과 렉처라는 형식 안에서 디브 알 아스마르의 서사는 실제 역사로, 창조된 캐릭터는 실존 인물로 오인된다. “그를 아무도 몰랐다”는 마지막 대사는 우리를 겨눈다. 관객 또한 특정한 프레임 안에서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 서사가 보여주는 역사의 실체란 무엇일까? 우리는 수조 속에 가라앉는 사진들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포착한 것인지 뚜렷이 파악할 수 없다. 집단 기억과 거대 담론의 시간은 리나의 지워진 역사를 복원하지 못한다. <시간이 없다>에는 한 인간의 부활을 되돌리는 죽음의 시간, 고유한 시간을 잠식한 이데올로기의 시간이 있다. 연극이 끝나고 스크린 위 얼굴은 자취를 감춘다. 그곳에는 기억의 색채가 떨어져 나가 그 무엇도 아니게 되어버린 흰 조각 모음들만이 얼기설기 남아있다.

 

 

김상옥 (연극원 연극학과)

gracegate@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