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수사과정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부지기수는 감정의 표현사로 이루어져있다. 정보만을 위한 언어교환 역시도 조사와 접사를 다양하게 사용하여 감정 상태를 드러내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언어는 감정을 표현하려는 도구로 정의해도 될 테다. “글을 잘 쓰는 최선의 방법은 진심”이라는 고리타분한 말이나 주기도 좋고 받기도 좋은 러브레터가 최고의 글쓰기라는 점은,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의 특성을 드러내는 방증이기도 하다. 더불어 국어시간에 배운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특정 ‘감정’을 요약하며 갈무리되었다는 사실 또한 하나의 예시다. 언어의 역사는 감정표현의 역사와 동의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가 맞닥뜨린 특정 감정 앞에서 내 표현력은 한계를 맞닥뜨렸다. 슬픔이라는 감정 앞에서 모든 발화능력을 잃어버렸다. 더 힘든 것은 배출구가 어려움을 겪을지언정 투입구에 쏟아지는 감정은 그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매시간 보도되는 특보들은 하나같이 슬픔으로 뭉치어, 그렇잖아도 폐색된 내 감정-언어 기관을 괴롭혔고, 이러한 증상은 비단 쓰고 말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아, 읽고 듣는 데에까지 슬픔에 관한 모든 묘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했다. 슬픔에 관해 발화된 언어종자를 보는 즉시 “왜 이렇게 써야했는가”에 슬퍼했다.
정치, 윤리, 안전 등 모든 문제들이 곪아 터져버린 세월호 침몰사고 앞에서 나는 ‘말할 수 없게’ 슬펐다. 전조부터가 크나컸던 비극성은 매일같이 늘어나, 슬픔은 계속하여 추가되고 연장됐다. 근래에 유달리 사건사고가 많다는 점은 너무 감상적일까. 도심 곳곳에서도 사건사고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훌륭한 건축가와 작가들의 비보가 있었고, 며칠 전에는 학교 코앞에 요식업을 하시던 사장님께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기도 했다. 그런데 더 어이없이 슬픈 문제는 사고 이후에 있다. 속속히 발견되는 ‘사실’들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말’에 대한 문제고, 그래서 ‘감정’에 대한 문제다.
며칠째 ‘인기검색어’인 청해진해운, 진도 세월호 침몰사고에 관한 ‘말’들을 얘기하자. 기자정신이라는 말이 오르내리며 유달리 ‘사실’에 대한 말들이 조명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한데, 나의 비애는 ‘감정’의 궤적과 함께하는 것으로서의 ‘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건의 수사과정(搜査過程)이 우리의 수사과정(修辭過程)과도 같다고 할 정도로, 요즘 발화되는 우리의 말들은 대체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을까하는 문제의식에서다. 나는 이번 사건만큼은 어떤 이해구도로 인한 감정들이 아니라, 모두가 ‘슬픔’의 감정을 얘기할 것이라고 봐왔었다. 현재 실종자 00명, 사망자 00명. 유족들의 상황과 전국민적인 트라우마까지 포함하자면 누구 하나 빠질 수 없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고를 당한 대부분의 승객들이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구조되지 못했다는 사실, 시체로 구조된 그들이 어머니께 사랑한다는 문자를 겨우 보내고 학생증을 부여잡고 죽었다는 사실들은 슬픔을 더욱 슬프게 만든다. 그러나 하루가 채 가지 않아 나는 ‘슬픔’을 어리둥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들을 쉽사리 발견했다. 누군가는 정부의 짓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했고 누군가는 종북 세력의 음해라며 이들의 척결을 주장했다. 굳이 정치적인 색을 띄지 않았더라도 선장이나 승무원에 대한 무자비한 분노와 그러한 감정을 표현한 욕설들이 이번 사고에 대한 말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잘못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책임에 대해 질타하고 분노하고 싶지 않단 말도 아니다. 다만 그러한 분노가 사고 직후에 바로 전체적으로 일어났다는 게 너무도 신경 쓰여서다. 말할 수 없이 슬픈 판국에 슬픔을 형용하려는 노력이 없었고, 극단적인 분노만이 형용됐다.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언어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기보다 ‘타인의 책임’에 대한 표현만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언어의 미성숙이기도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감정의 미성숙에 연유한다. 슬픔이 분노로 돌아서 수렴할 때에 어느 의심 없이 분노를 발화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언어로 풀이하려는 추상적 감정들의 종류에서 추상성의 위계를 나누었을 때, 표적을 정하는 분노가 슬픔보다는 구체적이었기 때문일까. 순진무구했을 정도로 바보 같았다는 과거의 사람들이 듣고 말해왔던 반공 이데올로기 역시 슬픔의 감정을 분노로 치환한 역사였다는 점은 이를 부정적으로 상기시킨다.
슬픔형용사를 찾으면 찾을수록 언어의 벽을 실감했다. 그러더니 결국은 이 글에서까지 분노의 말을 하고 있다. 가슴 아픈 커다란 사고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부족한 감정표현에 경멸을 느끼고, 죽음을 예감하면서까지 ‘사랑해’라는 말을 간곡히 전송하는 학생들에게 애도를 보내지 못할망정 어렴풋한 감정부터 어떻게든 해소하려는 무책임한 감정들을 질색한다. 조금이라도 슬픈 내 감정을 책임지려고 할수록 ‘말문이 막혔다’는 표현만이 살아남는 오늘이다. 삶을 두 종류로,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는 일들과 제발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는 일들로 나눈다면, 요즘은 부쩍 이게 다 꿈이었으면 싶다.

(최나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