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도 한때: 시 혹은 소설이 어떻게 만화가 될 수 있을까

봄꽃도 한때(출판사 미메시스). 이 자조적인 표제 아래 모인 다섯 명의 작가는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훼손을 당하는 민감한 시대에 갇혀있다. 세계화와 우경화, 자기 소외의 일상 속에서 공산품으로 소모되는 오늘날의 청춘들은 해방 전후 세대의 자기 인식을 새삼스레 떠올리게 한다. 해방 전후세대 작가군은 최초의 쓰기 언어이자 국어로 강제 당했던 일어를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모어(母語)인 우리말로 어렵게 작품을 써나갔다. 할 수 있는 말만 편히 내뱉기를 포기하고, 어눌하더라도 할 말은 하겠다는 의지. 그것은 남의 언어로 만들어지는 외부 현실에 대항해 자신만의 언어로 진지를 구축하겠다는 결연한 고백이기도 했다.
다섯 작가는 각각 해방 전후 세대 작가의 작품 하나씩을 골라 각자의 고유한 필체를 통해 재해석해냈다. 그 포문을 여는 심흥아의 “비오는 날”은 작은 슈퍼를 운영하는 남자가 심창섭의 “비오는 날”과 꼭 같은 원고를 써나가는 과정을 흐르는 필치로 묵묵히 묘사한다. 동시에, 슈퍼에 들리는 한 여자가 슈퍼주인과 알 수 없는 동질감에 젖어가면서도 현실원칙을 좇아 “놓치면 등신”인, 조건 되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까지의 풍경이 교차된다. 여자는 참 멀쩡해 보인다. 짧은 우기가 끝나면 언제 젖은 적이 있었냐는 듯 어정버정 돌아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그러나 여자의 안에는 남자와 나눠먹은 수박의 껍질처럼 도저히 소화되지 않는 무엇이 남는다.
그런 먹먹함을 통틀어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서윤아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어루만진 상실의 봄을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과 기묘한 해피엔딩으로 변주해냈다. 남자는 사후세계의 한적한 길을 걸어 외진 곳에 자리한 거대한 저택에 도달해 홀로 잠들고, 여자는 꿈에서 같은 길을 걸어 나가 기어코 남자를 찾아낸다. 먹지의 질감이 생의 배면(背面)을 투영하는 낯선 감각을 일깨운다면, 두 쪽에 걸쳐진 빈 지면을 경계로 화자가 교체되는 연출은 독자가 양팔을 뻗어 하얀 문을 밀고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는 환각을 안겨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문학』, 1934.

 

그러나 사랑이 늘 우리를 더 나은 장소로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배따라기”는 사랑하는 아내와 동생의 불륜을 의심한 끝에 파국에 이른 남자의 사연을 액자형식을 통해 짚는다. 박문영의 “세 사람이 있는 실내”은 김동인의 투박한 향취를 씻어내고 性반전을 통해 예술계의 주변을 음울한 기호로 표류하는 네 사람을 제시한다, 여주인공은 내면의 질척한 어둠을 감추고 직장인 미술관과 가정에서 능숙하게 가면놀이를 해나가지만 간호사인 남편과 그림을 그리는 동생이 깨끗한 맨얼굴로 동포 의식을 형성해나감에 따라 번민한다. 여자는 불륜 상대인 관장을 경멸하기 때문에 더 친밀하게 몸을 탐한다. 그는 여동생이나 남편처럼 “알량”한 “선량과 여유”로 그녀의 자격지심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조하게 끓어오르던 감정의 포화는 작은 벌레를 발단으로 가시화된다. 희생 제의처럼 남편은 사고를 당하고, “덜 마른 빨랫감”에서 나는 “악취”에 비유 당하던 동생의 그림만이 전리품처럼 살아남는다.

이처럼 꺾이지 않는 자기애와 자의식은 무척 위험하지만 반대로 자신을 놓아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경우의 우울도 만만치 않다. 박태원의 피로(부제: 어느 반일의 기록)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이지나의 ‘피로(부제: 어느 하루의 기록)’에서 주인공은 출판사에 다니는 틈틈이 자신의 그림을 그려보려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뾰족한 수가 없는 현실에 놓인 청춘들은 보통 언어장애에 걸려버린다. 그래서 박태원의 화자인 ‘나’는 신문사에 들러 친구를 만나려다가 돌연 그만두어버리고, 이지나의 ‘나’도 삶을 장악한 규칙적인 일상에 지쳐 이젠 질릴법한 풍광의 보고만을 줄 잇는다. 그러나 이지나의 ‘나’는 아직 희망적이다. 지하철의 할머니 등 사소한 주변과 얼굴 맞대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하얀 종이들은 가지런히 놓여 오늘도 주인을 기다린다. 아니, 이야기의 <시작>을 기다린다”는 독백에 이어 곧 찾아온 “아주 아주 새카만 정적”을 묘사한 검은 페이지는 밤의 순수한 서사성을 품고 울렁거린다.

그러나 우리가 늘 그런 식으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는 없을 거라는 슬픈 기미가 노영미의 “젊은이의 병”에서 포착된다. 윤동주의 시 “병원”에서 촉발된 이 작품의 화자에겐 주저와 무기력이라는 병변만이 확실할 뿐 막상 그 근원을 적출하려고 샅샅이 뒤지면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돈도” 버는 또래가 주변에 실재하지만, 하필 나는 진짜 나를 외면해야만 세속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모순 때문에 무의식이 사정없이 박해당하기 때문이다, 좋아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남자와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곤란한 외로움, 그리고 만나거나 아예 이별할 경우의 괴로움이 각각 의인화되어 화자 앞에서 대립하며 소극을 펼칠 때, 화자는 외로움을 택한다. “내게 남은 유일한 동화를 쉽게 마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업에 대한 분열적 고뇌는 작업물 자체보다 더한 심급에 도달하고, 화자는 그것에 “완벽한 미완성”이라고 이름 붙인다.

 

병원(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미완성.” 이보다 이들에게 더 어울리는 명패가 또 있을까. 이들은 “고작 서른” 언저리에 도달했지만 막 발병한 노화를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생각이 “뇌에 주름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고작 이마에 줄을 긋”는 나이.(“젊은이의 병”) 언젠가 스스로가 스스로인 것을 어쩔 수 없을 때 이들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누렇고 불길한 여자”가 될지 모른다.(“세 사람이 있는 실내”) 꽃은 피니까 지고, 마음은 부풀기 때문에 꺼지며, 육체는 단단해진 순간 곧 시들어 “찬란한 슬픔”을 주기에. 그래도 우리가 “꽃을 기억”한다면 반드시 “그 계절의 냄새가 떠”오를 것이다.(“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리고 여자와 남자가 수박과 함께 삼켰던 말처럼(“비오는 날”) “아직 시작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피로”)

 

(전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