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8년 4월 24일

나는 동의 없이 너의 몸을 먹었다

돼지 ‘P짱’이 자신을 두고 먹을지 말지 토론하는 초등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 <P짱은 내친구> 스틸컷

 

최근 많은 사람들이 시흥 고양이 학대 사건 영상을 공유하며 분노를 표했다. 그리고 지난 3월, 구제역으로 인해 6200마리의 돼지가 살처분 당했다. 몇천 마리의 돼지가 산 채로 땅에 쏟아진 그 날도 나는 누군가가 올린 돼지고기 사진을 보아야 했다. 만약 6200마리의 고양이의 생매장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을 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사람들에게 동물 학대에 반대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누군가 내게 왜 채식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똑같이 말하고 싶다. 나도 동물에 대한 학대와 폭력에 분노하고 있다고. 그리고 당연히 동물 학대에 반대한다고. 육식주의의 그늘에 지워져 버린 동물들, ‘고기’라는 이름으로 사물이 되어버린 돼지와 소, 닭, 물고기의 죽음에 반대한다. 고양이 한 마리의 죽음만큼 돼지 한 마리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래서 구덩이로 쏟아진 6200마리 돼지의 죽음은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한 친구가 길에서 보신탕집을 발견하고 비난했을 때 나는 돼지, 소, 닭의 죽음이 전시된 수많은 음식점 앞에서 분노한다고 말했다. 사실은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분노하다 지쳐버렸다. 돼지, 소, 닭, 수중동물, 개와 고양이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도 찾지 못하게 된 이후 ‘사물’로 보이던 것들이 비로소 죽은 동물의 신체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육식주의는 우리가 입고 먹고 쓰는 동물의 고통에 무관심하도록 우리를 보호해 왔다. 우리는 그 동물들이 사물로 인식되는 것에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식용 동물’,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동물을 용도에 따라 나누었다. 특정 동물의 고통에만 반응하고 동물 보호를 이야기했다. 여전히 많은 동물 보호 단체가 동물을 먹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동물’이란 어디까지일까. 개 식용에 반대하지만 돼지는 먹고, 모피에 반대하지만 가죽은 입는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돼지나 소를 반려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육식 사회는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강아지, 고양이와 다르지 않은 동물을 먹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 왔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동화책과 광고, 미디어에서의 소와 돼지는 헛간에서 뒹구는 더럽고 멍청한 식용동물이었던 것이다. 가상의 초원에서 그들은 몸을 내어 줄 운명이 행복한 것처럼 웃고 있다.

 

 파편화된 동물의 신체는 우리에게 사물로 다가왔으며, ‘삼겹살’, ‘갈비’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면서 동물의 존재는 감춰졌다. 그런 신체의 조각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있던 동물과 ‘고기’ 사이에 한 존재의 죽음, 그리고 살해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되었다. 우리는 오로지 그것의 맛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맛있으니까”라는 말로 그 너머에 존재하는 동물의 고통을 지운다.

 

 모든 동물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고 그에 따라 복잡한 감정 체계를 가진다. 닭이 인간의 표정을 닮지 않았다고 해서 그 감정을 평가 절하하는 인간의 착각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왜 귀여움으로 소비되는 동물들은 정해져 있고, 그 동물들은 온갖 인형과 이모티콘, 굿즈 등으로 상품화되며, 우리가 착취하는 동물들은 혐오와 유머의 소재로 쓰이는가. 인간은 종 차별주의에 기반하여 동물을 대상화하고 혐오하고 있다.

 

 어쩌면 고양이를 사랑하는 만큼 돼지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가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동물 해방 운동은 동물 애호가 아니다. 우리는 시혜적 위치에서 동물들을 ‘애호’하지 않고도 동물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다. 쓰다듬거나 소유하는 방식으로 특정 동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의 권리를 평등하게 바라보고 그에 대한 폭력을 똑같이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기를 비롯한 모든 동물의 부산물을 포기하는 이유이다. 종차별을 넘어서 이익에 대한 동등한 고려라는 기본적인 도덕원리는 모든 동물에게 확장되어야 한다. 나는 그런 사회에 완전히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이 동물의 신체를 먹거나 입는 것을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노예주

미술원 조형예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