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古代)의 여성 통역관

 

언어와 문화·역사가 서로 다른 국가와 민족 간에 정치·경제·문화를 교류하는 장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역관(譯官)이다. 역관은 일반적으로 역인(譯人), 역자(譯者), 설인(舌人), 역설(譯舌), 통사(通事)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러한 역관을 양성하고 공급하는 학문을 역학(譯學)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역원(司譯院)이라는 관청을 두고, 국가에서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역관을 양성하였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대외 관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역학과 그 교육도 성행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고대의 통역이나 역인에 대한 문헌자료가 매우 적으므로 고대의 비문이나 벽화 등에서 이와 관련한 자료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고구려의 덕흥리 벽화고분 속에서도 역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남성 역관뿐만 아니라 여성 역관의 존재는 놀랍다. 근대 이전의 여성 (통)역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1976년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발견되었다. 고구려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실봉토벽화분으로, 광개토왕대인 408년경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은 묘주의 공적인 영역[前室]과 사적인 영역[玄室]을 표현한 벽화들이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벽화와 관련하여 56군데에 약 600여 자의 명문이 발견되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묘주인 진(鎭)이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냈고, 이 무덤이 고구려의 무덤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아래 그림은 덕흥리 고분의 전실 서벽에 그려진 <태수래조도>이다. 유주자사 진에게 배례하러온 유주의 계현현령 및 13군 태수를 묘사하였고, 이 그림의 제일 우측에는 이들을 안내하며 묘주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통사리(通事吏)’가 상·하단에 각각 1인씩 그려져 있다. 두 사람의 ‘통사리’들과 계현현령, 13군 태수 곁에는 소속과 지위를 밝히는 묵서가 쓰여 있다. 또 각 인물들의 우측에는 노란색 바탕의 네모칸을 세로로 그려놓고, 그 위에 묵서로 인물의 직위와 더불어 “조정에 와서 인사할 때”, “조정에 왔을 때”와 같은 표현이 기록되었다. 각 태수의 직위를 알리는 상단과 하단의 글자들은 비교적 상태가 좋은 편이지만, 현재 자형만으로는 구체적인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통사’는 ‘통역관’을 일컫는 명칭이며, ‘리’는 ‘고대에 관원을 통칭하던 말’이다. 따라서 여기 보이는 ‘통사리’는 통역을 맡은 관원을 뜻한다. <태수래조도>에는 상단과 하단에 각각 한 사람씩 ‘통사리’가 있다. 상단은 관을 쓴 남성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고, 하단은 올림머리를 한 여성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이 두 사람은 각각 그림 옆에 묵서로 ‘육군태수래조시통사리’(상단), ‘제군태수통사리’(하단)라고 적혀 있으므로 ‘통사리’라는 관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단의 통사리는 여성 관리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통역관은 남성이 맡았을 것이라는 편견을 사라지게 하는 그림이다. 뿐만 아니라, 비록 하급직이지만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여관이 고대 벽화에 보이는 것도 드문 일이다. 지금까지 남겨진 문헌기록을 살펴보건대, 근대 이전까지 여성이 역관을 담당했던 사례는 없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에서 여성 통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여성사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신라와 백제와는 달리, 고구려는 관직에도 여성을 둘 만큼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여성 통사가 원래 고구려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외국으로부터 망명해 온 유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고구려에서는 여성이 외국어의 통역을 위해 관직으로 임용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특수한 경우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현대에도 많은 여성들이 통역의 업무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전혀 생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덕흥리벽화고분 전실 서벽의
덕흥리벽화고분 전실 서벽의

 

통사리는 마치 조선시대의 어전통사(御前通事)처럼 진(鎭)의 의사소통을 위해 부리던 통역관으로 보인다. 그림에는 맨 앞에 통사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그 뒤로 각 군의 태수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삼국지』 권30 「동이전」의 부여조에 “역인이 이야기를 전할 때에는 모두 꿇어앉아서 손으로 땅을 짚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와 같은 기사가 있어서 덕흥리 벽화에 보이는 역인의 모습과 상통한다. 묘주가 두 명의 통사리를 따로 두었다는 것은 두 통사리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역관제도를 살펴보아도 한(漢:중국어)·몽(蒙:몽골어)·청(淸:만주어)·왜(倭:일본어)의 역관이 따로 있었듯이 그 시대에도 구사할 수 있는 언어에 따라 통사리를 따로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들의 언어가 얼마나 달랐는지, 어느 계통에 속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좀 더 천착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정승혜(수원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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