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017년 6월 25일

‘콘서바토리’ 너머로

25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육시스템 어떻게 변화했나…

‘천재’에서 ‘융합·통섭’거쳐 산학협력까지

 

우리학교는 올해로 개교 25주년을 맞았다. 정부가 국립예술학교 설립계획을 공표한 1990년로부터는 벌써 27년이다. 1992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 켠에서 음악원이 처음 세워진 이후 학교는 내외적으로 많은 사건들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몸집을 점차 불려 나갔다. 학교를 떠난 졸업생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크고 작은 성과들을 내고 있고, 더 이상 학교 보도자료 속의 해외 콩쿨 수상 소식은 1년에도 수 차례 올라온다.

 

하지만 학교가 이와 같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콘서바토리(Conservatory) 혹은 도제식 교육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교육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도제식 교육 시스템은 우리학교의 설립 이념에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으면서 그간 학교 교육의 모든 근간을 이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가 막 세워지던 당시, 초기의 콘서바토리 모델이 어떤 것이었는지 돌아본다면 현재 우리학교의 위치를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제1회 정기공연(1993년) ⓒ경향신문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제1회 정기공연(1993년) ⓒ경향신문

 

초대 총장 이강숙의 ‘한예종’, “바둑의 이창호와 같은 천재” 양성 목표로

제1-3대 총장직을 역임한 이강숙 전 총장은 한예종의 태동기를 다루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92년 우리학교의 설립 시작 단계부터 초대 총장으로 참여해, 2002년 퇴임까지 10년간 학교를 이끌어왔다. 초창기 우리학교의 캐치프레이즈는 “유학을 가지 않는, 보내지 않는 예술교육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연극원 4기 졸업생인 연극학과 이성곤 교수에 따르면 “그때만 해도 음악이나 무용은 유학을 많이 갔는데 더 이상 유학을 보내지 않는 예술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게 이 학교의 모토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는 지나친 음악 고액 과외나 개인 지도로 인한 논란 등 예술교육 전반에서 대안적인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학교는 기존 예술교육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처음 출발했고, 그렇기에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 설립 취지에 따른 목표는 실기 중심의 ‘전문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이었으니, 이제는 그 대안적인 교육 방식이 무엇인지를 정할 순서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콘서바토리 체제가 체택됐다.

 

우리학교를 설명할 때마다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실기 중점 교육을 받은 ‘전문예술인’이란 말이 어디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실기 중심 예술교육에 대한 제언은 1993년당시 국회에 출석한, 문화부에서 학교 설립추진단장을 맡았던 김전배 사무국장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참고기사 제240호 “한예종 교육이념의 변화”) 당시 김 사무국장은 “기존의 음악대학이라는 것이 교양과목이라든지 이론에 치중이 되어서 실기를 연마하는 데는 부적합한 예술교육제도”라며 “우리는 줄리어드같이 실기 위주의 학교를 한번 만들어 보자 하는 것이 음악인들의 꿈이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 시기 우리학교의 설립을 보도하는 기사에서는 유독 ‘소수정예’라거나 ‘영재’와 같은 천재성을 강조하는 표현이 돋보인다. 이에 대해 당시 우리학교 설립추진단의 관계자는 “음악원의 경우 작곡 지휘 성악 기악 등 여러 분야가 있겠지만 한꺼번에 교수를 선발하기보다는 능력위주로 소수의 교수를 임용하고 교수가 있는 분야만 학생을 선발하는 형식이 될 것”[1]이라고 말했다. 또한 동일 기사에서 이강숙 교수는 학교에 대한 구상을 말하면서 “예술학교의 설립목표가 쉽게 말해 바둑의 이창호와 같은 천재를 갈고 닦아 배출하자는 것이므로 소수정예로 개교한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서 이강숙 전 총장은 우리학교 학생의 인재상에 대해 “바둑의 이창호와 같은 천재”라고 언급했다. 이강숙 전 총장은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이론 전공을 국내 최초로 만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음악교육자로 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느낀 한국 음악 교육의 한계에 대한 돌파구가 천재를 위한 실기 집중 교육이었다는 점은 초기 우리학교가 가진 방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른 부연 없이도 충분히 설명해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초기의 취지는 학교가 점차 커져가고, 6개원이 차례대로 개원함에 따라 점차 난관을 맞이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앞의 기사에서는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화행정이 초지일관하는 경우가 드물어 교수 캠퍼스도 없이 시작하면 좋은 뜻으로 시작했더라도 우물우물 현실과 타협하다 영재교육의 본뜻이 없어질까 우려된다”는 이강숙 전 총장의 말로 그 부분까지 미리 지적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기생들(1997년) ⓒ한겨레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기생들(1997년) ⓒ한겨레

 

실기 학교와 ‘이론 학과’, 되풀이되는 학위 논쟁 속 흔들리는 콘서바토리

이강숙 전 총장의 우려는 머지 않아 현실이 됐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학위 문제였다. 이는 당시 한국음악학회가 학회 차원에서 반대 성명서까지 제출한 중대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음악학회는 성명서를 통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이 기존대학과 동일한 음악대학이 된 다음 다른 대학에 앞서 특차로 학생을 선발하게 된다면 이는 현 교육제도를 파괴하는 일”이라며 “예술학교는 본래 취지대로 문화부 부령에 근거한 ‘각종학교’[고등교육법상 정규대학과 구분됨]로서 콘서바토리 체제를 유지해야 하며 음악이론 등 음악학과 연계된 분야의 학생 선발을 삼가야 한다”[2]고 말했다. 이에 당시 이강숙 전 총장은 “학력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상 예술사와 예술전문사에게 학사 및 석사자격을 주고 학교이름도 예술종합대학으로 할 수밖에 없다”면서 “음악이론부분은 외국의 유명한 콘서바토리도 교육과정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 콘서바토리 내부의 이론과 개설 문제는 십여 년 뒤 황지우 5대 총장 재임 시기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와 이론과 폐지 논란까지 이어지는 문제다.

 

이밖에 졸업생들의 진로 문제도 발생했다. 1997년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이와 관련해 우리학교 음악원 1기 졸업생들을 “갈 곳 없어 떠도는 ‘젊은 예술혼’”이라고 말하고 있다.[3] 이 기사에서는 “음악 영재들이 유학을 가지 않고도 전문 연주자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이 학교의 설립 취지였다”면서 “올해 처음 배출된 졸업생 54명 중 절반이 넘는 30여명의 학생들이 유학을 준비하고 일부는 벌써 유학을 떠났다”고 말했다. 이 중에서는 그저 음악의 본고장에 가보고 싶어서 유학을 간다는 학생도 있었지만, 여전히 실력보다 학벌을 중시하는 풍조때문에 유학을 떠나는 학생도 있었다. 이에 당시 허영한 학사담당교수는 “각종 콩쿠르에서 발군의 실력을 과시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생들이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벌주의의 벽을 넘기는 아직 어렵다”고 말했다. 이처럼 학벌주의가 남아있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학교의 학위 문제는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재’냐 ‘제도’냐? 딜레마 속의 예술학교

그런데, 이 시기 즈음 콘서바토리를 둘러싼 논의와 관련하여 한 가지 눈에 띄는 자료가 있다. 바로 2001년 황지우 5대 총장이 아직 총장직에 재임하기 이전 작성한 「‘천재’냐 ‘제도’냐 -예술학교에 있어서 창의성 교육을 위한 제언」이 그것이다. 이 문서는 이후 황지우 5대 총장의 행보와 함께 살펴봤을 때, 학교의 교육 시스템 변화 과정에서 다소 파격적인 반환점이 된다. 이 문서에서 황지우 5대 총장은 “아카데미 내지 콘서바토리 학교의 예술교육 시스템에서 실로 우려되는 문제점은 실기 중심 교육에 대한 강조로 말미암아 제작 교육에 편향된 교육적 불균형에 있다고 하겠다”며 “위대한 예술가가 반드시 좋은 예술교사는 아니다”라면서 “콘서바토리 교수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교육학이다”라고 말했다.

 

실기 중심 교육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은 이후 유-에이티 통섭교육 사업과 협동과정 설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황지우 5대 총장이 유-에이티 통섭교육 사업에 대해 말한 “6개 예술장르 간 소통과 융합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촉진할 입체적인 연구-창작-교육-산학협동 체계의 제도화”는 기존의 실기 중심 천재 교육과는 다소 다른 맥락에 위치하게 된다. 이 사업은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 등을 거치며 무산되었지만 당시 사태와 관련된 논의와는 무관하게 이 시기는 우리학교의 콘서바토리 체제에 있어서 일종의 변곡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김봉렬 6대 총장 ⓒ한국일보

김봉렬 6대 총장 ⓒ한국일보

 

‘중창(重創)’ 그리고 ‘업그레이드 한예종’의 너머에는…

박종원 6대 총장은 ‘예술의 사회적 가치’라는 슬로건 아래 ‘사회에 기여하는 예술가 교육’을 내세웠다. 이어 취임한 김봉렬 7대 총장은 건축 용어인 ‘중창’(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음)을 슬로건으로 내걸며 전공 심화교육과정과 융복합 교육과정의 2트랙 과정 적극 활용, 학교의 숙원인 학위 문제해결 등을 목표로 삼았다. 김봉렬 총장이 취임 당시 제시한 ‘업그레이드 한예종 프로젝트’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당시 김 총장은 “업그레이드 한예종 프로젝트를 통해 교수 정원의 확대와 세계적 수준의 우수 교수 확보, 아시아 예술교육의 허브를 통한 학교의 국제적 위상 제고, 새로운 아이템과 아이디어 개발을 통한 공공재원 증대, 발전재단과 산학협력단을 활용한 민간 재원 확충 등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초기의 ‘천재’ 예술인, ‘전문예술인’ 교육에서 출발한 학교는 이제 통섭과 융합을 넘어 산학협력과 공공재원 증대로 눈을 돌리고 있다. 황지우 5대 총장의 제언 이후 학교는 이미 초기의 설계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이다. 심지어 지난 3월 예술교양학부 진휘연 교수는 “우리학교가 콘서바토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라면서 “우리학교와 같은 구성을 갖고 있는 학교는 해외 사례를 찾아봐도 없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처럼 ‘콘서바토리’라는 말이 더이상 궁극적인 해답이나 지침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학교는 물론이고 학생들까지도 혼란을 겪으며 헤매이는 모양새다. 그 형태가 ‘중창’이 되건 ‘업그레이드’가 되건 ‘종합대학’에 가까운 제도와 여전히 ‘천재’를 지향하는 학교 이념 간의 괴리 속에서 학교는 이제 분명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서동완 기자

official05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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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연철, 「한국예술종합학校 내년3월 開校」, 『동아일보』, 1992.02.13. 12

[2] 「예술종합학교 「綜合大」변신 움직임에 음악학회「반대성명서」」, 『동아일보』, 1993.04.27. 14

[3] 오창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첫 졸업생들 갈곳없어 떠도는 ‘젊은 예술혼’」, 『경향신문』, 1997.03.2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