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비평
2017년 3월 27일

흩어져서 아주 보이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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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학자가 될 거야” 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릴 적 ‘암흑물질’이라는 개념을 어디서 처음 주워들었을 때, 나는 막연히 ‘이 암흑물질을 밝혀내서 우주의 마지막 비밀을 푸는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었다. 천문학을 전공하면 근사하겠지 싶었다. 노벨상을 받는게 아닐까 헛물을 들이켰다. 고등학교 진학 후 치른 첫 시험에서 처참한 과학 성적을 받아들자마자 산산조각난 꿈이긴 했지만, 어쨌든 꿈은 꿈이었다.

 

암흑물질(dark matter)이란 우주에 널리 분포해 있으며, 빛과 상호작용하지는 않지만 질량을 가지는 물질을 말한다. 다른 물질과는 섞이지도, 반응하지도 않는다. 중력은 질량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어떤 천체에 중력이 미치려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질량을 가진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이에 대해 밝혀진 바는 거의 없다. 이 ‘아직 찾지 못한 질량’을 총칭하여 암흑물질이라 부르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영어권에서 ‘dark’는 어둠이나 암흑만이 아닌 불분명함이나, 미지, 비밀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하니 쉽게 생각하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물질’ 정도일 것이다. 우주는 가시물질(visible matter) 5%, 암흑에너지(dark energy) 68%, 암흑물질(dark matter) 27%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곧 우주 전체 질량의 95% 이상이 아직 인류가 건드리지도 못한 영역이라는 소리다.

 

암흑물질문제(dark matter problem)[1]에 대한 정설은 없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우주의 가속팽창을 야기시키고 그에 관여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사실 아직까지는 우주의 팽창현상 그 자체도 가정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실 암흑물질의 실존 여부조차 확실한 것은 아닌 셈이다. 학계에서는 암흑물질을 구성하는 입자 자체가 미확인[미발견] 입자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혹은 블랙홀이나 원자, 비활성 뉴트리노[2]가 되지 못하고 남은 잔여물일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앞서 아직 가정 수준이라고 설명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이 팽창의 중단, 혹은 역행의 키를 암흑물질이 쥐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주가 가속팽창 중이라는 전제 하에, 암흑물질의 존재는 거의 확실시된다. 은하 등의 총 질량을 계산할 때, 광학적 관측을 통해 얻어진 값이 중력효과를 통해 계산한 값보다 현저히 적은 탓이다. 별은 은하를 중심으로 돈다. 중력 법칙에 의하면 은하에서 멀리 떨어진 별일수록 회전 속도는 더 느려야 한다. 그러나 천문학자 베라 쿠퍼 루빈(Vera Cooper Rubin)의 관측 결과는 달랐다. 은하에서 조금 떨어진 별이든, 멀리 떨어진 별이든 사실 속도 차이는 미미하다는 것이다. 루빈은 이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직 밝혀지지 못한 ‘어떤 물질’의 존재를 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은하에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질량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관측은 암흑 물질 문제를 처음으로 수면 위에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잠깐 화제를 돌려서, 영화 <우리 손자 베스트>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나에게는 주인공보다도 어버이별동대 애국노인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존재로 표현되는 박카스 아줌마 ‘숙희’에 대한 잔상으로 어지러운 영화였다. 그녀는 분명히 그들과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동료 격의 위치에 있으나 그들이 만드는 서사에서 중요한 지점마다 비참하게 배제되며, 종로 어느 뒷골목에 있는 단칸방에서 잠자리 상대가 되어주거나 잔술집에서 술을 따라주거나 그것도 아니면 화풀이의 표적이 되어 뺨을 얻어맞고 모욕적인 말을 듣는 절대적 약자의 모습으로만 묘사된다. 딱, 그렇게만 묘사된다. 하지만 술주정처럼 치부된 그녀의 대사 중에는 미군 기지촌에서 윤락하며 살던 내가 나라 다 살린 것이다, 산업역군이라 추켜세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나를 이런 취급 하느냐, 같은 울음 섞인 말도 있었다. 그녀는 어쩌다 흘러 흘러 종로 뒷골목까지 오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처음과 끝만 있고 중간이 생략된 인물 같았다. 그녀의 삶도 영화 한 편 만들기에 부족함 없는 고난의 세월이었을 것 같은데 싶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이렇게 단면적으로만 등장하는 인물이나, 지나가는 아주 작은 배역에까지 전사를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 이전에 보았던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주인공도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로 살고 있는 ‘소영’이었다. 소영도 숙희와 마찬가지로 동두천 기지촌에서 윤락을 하다 중년이 되어서야 빠져나왔고, 나이가 들어서도 탑골공원에서 매춘을 하며 벌이를 충당한다. 다만 소영에게는 같은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연대나 밥벌이 이외의 일상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영화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우리 손자 베스트>의 그녀와 소영이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이것이다. 영화 속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지는, 그냥 지나가는, 혹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들 하나하나에 전사를 부여하고 그들이 살아온, 혹은 살고 있는 삶의 결을 속속들이 묘사한다면 시나리오 하나씩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영화 속에는 얼마나 많은 작은 영화들이 들어차 있는 걸까.

 

영화에서 관객이 알 수 있는 정보는 중심인물과 중심적인 배경이 되는 시대, 장소, 사건 등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디제시스[3] 세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중심 요소의 여집합이 반드시 필요하다. 가령 메인 캐릭터의 어린 시절 자아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소꿉친구의 존재라거나 첫사랑, 중심 사건이 촉발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소한 사건들, 두어 달에 한 번씩 연락하는 고모, 내러티브 상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인물(<우리 손자 베스트>의 숙희 같은)의 전사, 중심 인물의 이웃나라에 살고 있는, 영화 내에서는 전혀 가시화되지 않은 외화면의 인물들 같은 것이다. 관객뿐만 아니라 디제시스 세계를 구축한 장본인인 연출자조차도 이러한 외화면의 세계 전부를 세심하게 설정하지는 않는다(혹은 할 수 없다). 이는 ‘우주에 널리 분포해 있으며 우주의 작동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지만 전혀 규명되지는 못한’ 것이라는 점에서 암흑물질의 성질과 유사한 면을 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는데, 암흑물질이 없다면 우주는 수축할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내화면’이라는 은하를 뒷받침하는, 규명되지 않은 암흑물질(디제시스의 외화면)이 아예 없다면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주인공의 활동 영역, 주인공이 살고 있는 시간대로 한정된 조건 안에서 만들어지고 전개되는 이야기는 결국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즉 비가시화된 외화면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영화 속의 일들을 실제 삶처럼 만드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하나의 은하가 명을 다하고 우주에서 사라진다 해도 우주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화면의 서사가 마무리된다 해도 화면 바깥의 세계는 지속된다. 영화가 끝난다고 해서 디제시스 세계가 쪼그라들고 박살나는 것은 아니다. 엔딩크레딧이라는 불투명한 레이어에 가려짐으로써 관객에게 영영 비가시의 영역이 되어버리기는 하지만, 프레임 바깥의 세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는다.

 

많은 경우, 영화는 주인공을 프레임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그를 외화면의 세계로 떠나보낸 뒤 막을 내린다. 말순과 동이를 안전한 율도국으로 옮겨 놓고 ‘어딘가의 전장’으로 사라진 <탐정 홍길동>의 홍길동이 그랬고, 도희를 데리고 ‘어딘가로’ 떠난 <도희야>의 영남이 그랬고, 아이들과 함께 ‘산 너머 어딘가’ 외화면의 세계로 발을 딛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부부가 그랬다.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인물들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디제시스의 알려지지 않은 공간 속으로 떠나고, 모든 세계가 엔딩크레딧 너머로 사라지고 나면 나는 그들이 어디에서 뭘 하며 어떻게 살게 될지에 대해 갑자기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에 놓이고 마는 것이다. ‘주인공’은 디제시스의 핵심이자 감독이 가장 공들여 만든 피조물이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공간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그들은 비가시화된 인물로 전환되고, 영화를 둘러싼 외화면의 세계는 팽창한다. 우주처럼.

 

[1] 암흑물질을 구성하는 성분에 대한 담론 일체를 총칭하는 말

[2] 중성미자(中性微子). 표준모형에서 경입자에 속하는 소립자의 하나.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3] 디제시스(diegesis): 영상물의 내러티브 내부에서 묘사된 허구의 세계. 스크린 위에서 전개되는 모든 허구의 실재를 지칭한다.

 

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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