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16년 11월 19일

촛불 밝히는 거리문화

‘100만’ 모인 12일 민중총궐기 속 문화행동을 만나다

“촛불은 바람 불면” 번지는 것으로 밝혀져…

 

12일 민중총궐기 광화문광장 풍경 ⓒ박형남

12일 민중총궐기 광화문광장 풍경 ⓒ박형남

 

지난 11월 12일,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의 파도가 광화문광장 일대를 가득 메웠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이 도화선이 된 ‘박근혜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 백만 명(주최측 추산)이 민중총궐기 행진과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3차 범국민행동’에 모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인파다. 청소년, 대학가, 학계, 노동자, 시민단체를 비롯해 성·연령·직업을 불문한 이들이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구호로 뜻을 같이 했다. 그러나 역대급의 인파가 운집한 만큼 시민들이 이를 표출하는 방식은 각기 달랐다. 흡사 거대한 문화제나 박람회처럼 보이기까지 한 이날 벌어졌던 다양한 문화행동을 살펴보자.

 

#1 탑골공원: 모여라, 청소년

 

탑골공원은 서울의 노년층 집결지로 유명한 장소지만, 이날 탑골공원을 장악한 것은 다름아닌 10대 청소년이었다. 오후 3시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사전집회 ‘전국청소년시국대회’가 열렸다. 약 4천여명(주최측 추산)의 청소년이 다양한 지역에서 올라와 모인 가운데 청소년지도자연대 회원들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개사한 대중가요에 맞춰 ‘청소년이 주인이다’라고 적힌 피켓을 흔들었다. 이날 모인 지방 청소년들 중에서는 지난 5일 광화문 집회 당시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이 약 4,800만원의 차비를 모아 대절한 버스에 탑승해 온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이날 개회사를 낭독한 고양국제고등학교 2학년 최은호 씨는 “단순히 학생이어서 기성세대를 탓할 수만은 없다, 기득권과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이들에 대해 응징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는 자신의 주권이 침해되었다고 생각하는 모두에게 주어진다”며 역설했다. 뒤이어 다른 청소년들의 개인 발언이 이어졌고, 5시부터는 행렬을 이뤄 본격적으로 광화문 일대를 행진했다. 인천 소재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청소년 이샛별 씨(17·가명)는 “세월호 참사와 정유라 씨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및 특혜 논란을 목격한 만큼 우리 청소년들 역시 현 시국에 대해 목소리를 낼 역할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청소년들의 방식으로 모여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 즐겁다”고 사전집회 참가 소감을 밝혔다.

 

#2 광화문광장: 다양한 퍼포먼스

 

“미래에서 온 예언자 일보입니다! 박근혜가 하야했답니다.” 이날 오후 4시,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예언자일보〉 창간호가 배포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민중총궐기 “네트워크”에서 의견이 제기되어 새나라새방구가 기획·제작한 〈예언자일보〉는 1면에 “하야 했다 치고”라는 헤드와 박 대통령의 사진을 배치했다. 모든 기사가 예언자일보 제작에 참가한 기자들과 편집자의 ‘예언’으로 이뤄졌다. 하야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내달부터 모든 연극·영화 포스터에 ‘성평등 지수’ 의무 표기” “대학교까지 전면 무상교육 실시, 그 후 5년” 등 다양한 가상 기사가 실렸다.

 

예언자일보 1면 ⓒ새나라 새방구

예언자일보 1면 ⓒ새나라 새방구

 

예언자일보 제작을 제안했던 새나라새방구 소속인은 “박근혜 퇴진 이후 우리가 바라보는 투쟁의 이유들을 표현하고, 시위에 동참하는 주체적인 개인의 목소리들이 더 표현되었으면 좋겠다는 문제 의식에서 비롯됐다”며 “하야하라 외치는 것보다 그 이유가 구체적으로 표현될 때 우리의 목소리를 더 강하게 해 줄 거라 생각했다. 새로운 시위 방법을 고민하던 중 친구들이 쓴 대자보를 보고 예언자일보 제작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됐다. 이 일이 우리의 역량 안에서 충분히 가능한데다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더이상 꿈꾸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을 함께 뚫고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길 바랐다. 일정이 촉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인 사람들 모두가 글을 쓰고 아이디어를 제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저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곳곳에서 원고가 들어왔다. 작가집단 미상에서 삽화를, 농업에 종사하는 배용하(논산)·김세혁(홍성) 님이 글을 제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에서 기자로 일했고 현재 두 아이의 어머니인 복태 씨의 시와 사자성어를 실었다”고 기획의도와 제작과정을 이야기했다.

 

지난 10월 12일 익명의 문화계 인사의 증언으로 총 9,473명이 기재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공개되면서, 이번 총궐기에는 많은 문화예술인이 함께했다. 영화진흥위원회 노동조합 30여명, 영화배급사 앳나인 정상진 대표, 서울독립영화제 조영각 집행위원장 등 다양한 영화인들이 참여한 것은 물론, 자신을 ‘문체부 블랙리스트’로 소개한 임옥상 화백은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모형에 못을 꽂는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현장에 있던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청계천 한빛광장에서는 언론노조 사전결의대회가 펼쳐져 이후 전국노동자대회 궐기에 합류했다.

 

도발적인 퍼포먼스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4m 가량의 거대한 세월호 배 모형에 ‘진실’, ‘구조 안 함’ 등의 쪽지를 붙인 작품도 등장했으며, 흰색 풍선 모양의 소녀상도 저녁 6시께 광화문 광장 중앙에 배치됐다. 응원가 등으로 자주 쓰이는 노래 〈아리랑 목동〉의 가사를 ‘하야’로 개사해 부르기도 했다. 농민들은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문구 플랜카드가 걸린 상여를 매고 거리행진을 했다. 지난 10월 29일 주말 집회에서 한 차례 등장했다 철거된 단두대 모형이 이번 총궐기 때도 재차 등장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외에도 주최 측은 김미화, 김제동 등의 연예인을 초청하고 전범선과 양반들, 조PD, 크라잉넛, 이승환 등 가수들의 공연을 진행했다. 서태지의 〈하여가〉를 개사한 〈하야가〉에 맞춰 영상을 틀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화행사에 참석했던 시민 이주현(22·경기도) 씨는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나 조PD 〈친구여〉 무대가 현 시국에 딱 맞는, 시민들을 위로해 주기 좋은 곡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적이었다. 시위라는 게 엄중하고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3 거리: 행진하는 색색의 깃발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주최 측이 준비한 범국민행동 문화행사가 진행되는 한편, 율곡로와 사직로를 비롯한 청와대 앞 5개 방향에서는 가두행진이 벌어졌다. 행렬 앞에는 대학, 정당, 시민단체 등 다양한 깃발들이 펄럭였다. 시민단체로는 역사, 교육, 문화, 노동, 장애인, 복지 등 분야를 막론한 각계의 참여가 활발했다.

 

페미니스트 단체와 LGBT 퀴어 단체 등의 깃발들도 다수 돋보였다. 페미니스트 단체인 “페미당당” 행렬에 참가한 시민 최유진(25·가명) 씨는 “저번에 페미당당에서 진행했던 낙태죄 폐지 시위에 참석하는 등 의견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아 행렬에 꼈다. ‘암탉’이나 ‘병신년’, ‘아줌마’와 같은 여성혐오적 워딩을 사용하지 않고도 현 시국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빠른 하야를 촉구하며, 세상을 바꾸는 여성이 되겠다”고 행진에 참가한 이유를 밝혔다. ‘무지개’ 깃발을 찾아 행렬에 끼었다는 성소수자 김석현(27·가명) 씨는 “시국이 안정돼야 인권운동도 진일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국만 중요하고 내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함께 가야 한다”며 자기의 운동 방향을 확고히 말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수천여 명의 시민들이 청와대 인근 내자동 사거리 앞에 쳐진 차벽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 시민과 경찰과의 물리적 대치도 일부 벌어졌다. 차벽 앞에서 집회와 자유발언이 이루어지고, 차벽 앞에 선 노동당 유세차량은 뮤지션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공연으로 흡사 클럽음악 디제잉 파티장처럼 변하기도 했다. 남은 시민들을 중심으로는 아침까지도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난장’ 행사가 이어졌다.

 
‘박근혜 게이트’로 대통령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5%를 기록한 지 어느덧 3주째다. 유례없는 규모와 다양한 방법으로 열린 이번 집회는 국가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높은 비판의식과 분노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이번 집회가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보다 바른 사회로 나아가는 데 지속적인 힘을 불어넣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신호 기자
mat3ch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