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비평
2016년 6월 26일

서사인가? 놀이인가?

비디오게임 학계의 낡은 논쟁에 대하여

 

 

이 원고는 글쓴이의 학위논문 일부를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비디오게임에 대한 담론의 지형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미국의 학계에는 비디오게임 연구에 관한 논의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져왔다. 『사이버텍스트』의 저자 에스펜 올셋(Espen Arseth)을 중심으로 일군의 학자들이 발간한 저널 《Game Studies》는 비디오게임에 관한, 그리고 비디오게임을 위한 학문적 저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에스펜 올셋은 2001년에 발간한 이 저널의 첫 볼륨, 첫 이슈에서 게임 연구(Game Studies)의 원년을 선언한다. 올셋은 비디오게임이 이미 거대한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를 위한 학문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디오게임이 다른 어느 문화적 형식과도 구분되는 고유의 형식임을 주장하며 비디오게임 연구가 기존 학문의 분과가 아닌 고유의 학문으로 성립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입장을 공유하는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나 마쿠 에스켈리넨(Markku Eskelinen), 제스퍼 율(Jesper Juul) 같은 학자들은 비디오게임이 이처럼 고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연구에 있어서도 고유한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러한 입장들과 달리 비디오게임을 서사 매체라는 기존의 양식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다. 이러한 경향의 연구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연구인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의 저자 자넷 머레이(Janet Murray)는 비디오게임의 서사 매체로서의 특성에 주목한다. 그는 주사위 게임조차도 상징적 드라마의 실행이라고 주장하며, <테트리스>에서는 “과중한 일에 시달리는 1990년대 미국인의 삶의 모습”을 읽어낸다. 그러나 에스펜 올셋을 위시한 일군의 학자들은 자넷 머레이처럼 비디오게임을 서사 양식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들을 비판한다. 올셋은 비디오게임은 서사가 아니라 시뮬레이션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게임은 다른 매체들처럼 텍스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기존의 방식과 같은 독해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비디오게임은 독해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립되는 두 관점은 비디오게임을 다루는 학계의 해묵은 논쟁으로 자리잡았다. ‘루돌로지 대 내러톨로지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논쟁은 에스펜 올셋과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루돌로지(Ludology)와 자넷 머레이와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내러톨로지(Narratology, 서사학)가 대립하는 양상을 띠었다.

여기서 루돌로지란 체스나 바둑같은 전통적 형태의 게임에 대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개념으로 ‘루두스’(Ludus)(놀이를 뜻하는 라틴어)에 관한 학문(Ology)를 의미한다. 올셋처럼 서사학에 반대하며 게임을 게임으로 다루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이나 곤잘로 프라스카나 제스퍼 율처럼 스스로를 루돌로지의 입장에 서있음을 선언하는 학자들은 루돌로지스트로 지칭되곤 한다. 이때 중요한 건 곤잘로 프라스카나 제스퍼 율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선언으로서의 루돌로지’이다. 에스펜 올셋이 새로운 분야의 학문으로서의 게임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게임 연구 원년을 선언한 것처럼, 루돌로지는 확고하게 자리 잡은 학문이 아니라 존재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여전히 태동하는 단계에 있다. ‘게임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기존의 학문이 아닌 왜 고유의 특화된 학문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루돌로지는 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매체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넷 머레이가 루돌로지가 ‘게임 본질주의’ 라는 이데올로기도 포함한다고 지적한 것처럼, 루돌로지는 방법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문적 분야를 성립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이는 루돌로지와 서사학 간의 논쟁이 주로 루돌로지의 입장에 선 학자들이 비디오게임에 대한 서사학적 접근을 비판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루돌로지스트들에게 게임의 본질이란 추상적 형식인데, 가령 <테트리스>는 비디오게임의 본질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들에게 게임이란 <테트리스>처럼 추상적 형식들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하는 매체인 것이다. 이들은 서사학자로 대표되는, 다른 문화적 양식의 연장선상에서 게임을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들을 일종의 학문적 ‘식민주의’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봤을 때 루돌로지는 ‘컴퓨터 게임 형식주의’라는 명명이 더 적합해 보인다는 자넷 머레이의 지적처럼 이들 또한 ‘형식주의’라는 기존 서사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셈이다. 올셋 스스로도 루돌로지스트들 또한 모두 다른 학문을 전공한 학자들이기에 이러한 기존의 학문들이 그들의 방법론을 필연적으로 결정하고 추동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올셋은 비디오게임 연구를 기존 학문들의 영역으로 남겨두면 비디오게임 고유의 특성을 놓치게 될 것이므로 고유한 학문 분야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오랜 논쟁은 결국 곤잘로 프라스카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가상적인 것이기도 하고, 자넷 머레이의 지적처럼 ‘허수아비 치기’이기도 하다. 루돌로지 또한 내러톨로지의 유산을 이어받았으며, 내러톨로지스트로 분류되는 학자들도 게임의 고유한 특성을 결코 무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김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