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비평
2016년 6월 26일

아름다움의 우회로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

 

<아름다움의 구원(DIE ERRETTUNG DES SCHONEN)>, 2016

저자: 한병철

출판사:문하과지성사, 2016

페이지: 130

청구기호: 입고예정

 

아름다움의 구원

아름다움의 구원

 

 

<에로스의 종말> 이후로 한병철의 신작이 나왔다. <아름다움의 구원>, 수많은 철학자가 그래 왔듯 그도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아름다움, 혹은 예술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이다. 물론, 사랑을 말할 때 그것은 결국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기‘에 이러한 행보는 <에로스의 종말>에서 이미 예견된 바 인지도 모른다. 또한 타자와 주체의 문제를 주된 화두로 삼고 있는 <아름다움의 구원>은 결국 어떤 면에선 <에로스의 종말>에 연장 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 여기서 물어야 하는 건, 왜 또 다시 아름다움인가? 그리고 아름다움의 구원이라 함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함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름다움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 책의 표지엔 우리에게 익숙한 풍선 개 한 마리가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다. 어디 서나 흔히 볼 법한 이미지, 우리에겐 제프 쿤스의 작품으로도 익숙한 이 그림은 저자가 글을 전개하는 내내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매끄러움’을 체현한 대표적인 이미지로, 저자에 의해 시종 철저하게 분쇄된다. ‘매끄러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만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의 긍정적인 특성, 아름다움의 반영과도 같은 ‘매끄러움’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저자는 ‘매끄러움’을 아름다움의 주된 속성 혹은 아름다움으로 보는 견해가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까지 맞닿아 있음을 여러 텍스트를 인용하며 설명한다. 18세기는 서구에서도 미학이 그 학문으로서의 자율성을 인정 받고 하나의 학문 분과로 자리매김한 시기, 그 과정에 있어 대표적인 역할을 한 칸트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주로 주체의 쾌와 불쾌의 감정과 관계 되는데, 부정적인 속성들은 ‘숭고’로 설명되며 ‘미’와 ‘숭고’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미’와 ‘숭고’의 분화는 사실 저자도 언급하다시피 칸트 이전에 영국 정치가이자 학자인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인데, 이러한 분화가 문제 되는 것은 이러한 과정 속에 적어도 플라톤과 고대 서구권에서 인정되던 아름다움의 부정적 계기가 배제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플라톤에게서 아름다움과 숭고는 구별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볼 때 우리는 전율을 느끼게 되고, 그(플라톤)에게서 아름다움은 ‘충격’ 혹은 ‘광기’ 등과 맞물린다. 하지만 이에 반해 적어도 저자 한병철에 의하면 근대미학은 이에 철저하게 대립한다. 물론 그도 인정하다시피 칸트가 말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이해관심이 결부되지 않은 흡족함’ 이라 할 때, 이것이 감각에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즉 ‘매끄러운’ 대상에 대한 욕망과는 무관한 것임을 언급하지만 그것이 주체의 자율성과 자기만족을 뒤흔들기는 커녕 오히려 확인시켜주는 만족을 일컫는 것이라는 점에선 여전히 비판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주체의 자기만족을 재확인 시켜주는, 혹은 타자의 주체화로서 이해되어지는 (특히 버크와 칸트에게서의) 아름다움과 숭고는 여전히 자기애적인 주체성의 확대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미와 숭고는 근대에 분화된 것과는 달리 그 근원이 다르지 않으며,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나뉘어진,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엔 도덕적 선과는 무관하게 이해되는 아름다움을 다시 윤리적,정치적 측면에서 생각해야 되는 부분을 지적한다. 결국 아름다움의 구원이라 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름다움에 대한 재정의, 고대에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아름다움과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었던 것을 언급하며  ‘진리의 생기’로서 아름다움을 보아야 하는 지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아름다움의 은폐성, 상해성(傷害性) 등을 거론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넘쳐 나는 시대, 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대상을 접한다. 물론 우리가 무엇을 아름답다 여기는지,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이 아름답다 하는지 더 근본적으론 아름다움의 초월적 기준은 무엇인지 재고가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자의 말마따나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는 자연미와 아름다움이 오늘날의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 될지도 모르기에.

 

 

정의현 기자

sungwon7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