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비평
2016년 6월 24일

Ⅲ.초기독일낭만주의 사상의 정리 혹은 결론-세계를 낭만화하라

 

1)초기독일낭만주의 사상과 관련하여 슐레겔의 철학의 핵심은 ‘알레고리론’에 있다. 무한자인 우주자연의 운동도, 이에 대한 의식의 운동도 알레고리를 낳는다. 삼라만상은 단순한 개체 혹은 사물이 아니라 무한자가 산출한, 무한자 자신의 알레고리로서 신성을 지닌다. 또한 인간의 의식 활동도 개념(=철학)과 감각적 표현물(=예술)을 무한히 산출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의식을 통해 포착된 무한자에 대한 개념과 감각 역시 무한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알레고리일 뿐이다.

알레고리론을 통해 우리는 슐레겔이 ‘신인동형론(神人同型論 , anthropomorphism)’의 입장에 서있음을 알게 된다. 무한자(=신성)의 운동도, 의식(=인간)의 운동도 모두 알레고리, 즉 상(像)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무한자와 의식의 본질은 공히 ‘상을 만들어내는 능력’, 즉 ‘상상력(Einbildungskraft)’이다.

무한자의 운동은 삼라만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인간도 무한자의 운동의 산출물, 피조물이다. 그렇지만 역으로 무한자는 인간의 의식의 운동의 산출물이다. 여기서 신(성)은 인간을 만들어 냈고, 인간은 신(성)을 만들어 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2)인간이 절대자 혹은 무한자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자 본능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주자연으로부터 숭고의 감정을 느끼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숭고의 감정 자체를 규명할 수는 없다.

슐레겔의 숭고 개념은 칸트에 의한다. 즉 우주자연의 위대함(수학적 숭고)과 압도적인 힘(역학적 숭고)은 인간의 의식이 포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우주자연은 무한한 형식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또한 무한한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힘을 지닌다. 이로부터 인간은 숭고의 감정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런 설명은 인간이 숭고의 감정을 어떤 조건에서 느끼는 지에 대한 설명이긴 하지만 왜 그런 조건이 주어지면 숭고의 감정이 발생하는지, 다시 말해 숭고의 감정 자체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인간이 생겨먹길 그렇게 생겨 먹었다.”

숭고의 감정은 인간의 (의식의) 한계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이다. 따라서 숭고의 감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이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불러일으킨다. 즉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서 인간 각자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 각자의 이상 추구는 또다시 각자의 개별적인 노력이라는, 즉 주관성·유한성이라는 한계에 부딪힌다. 인간은 자신의 이상 추구가 개별성을 넘어서 보편성을 얻기를 원한다. 슐레겔은 인간 각자가 추구하는 이상이 보편성을 얻고자 할 때, ‘무한자에 대한 동경’이 된다고 본다.

(물론 슐레겔은 불가능하다는 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철학자의 이상은 무한자를 완전히 개념적으로 파악하는데 있을 것이다. 시인(=예술가)의 이상은 무한자를 감각적 형식으로 온전히 표현해 내는데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슐레겔의 입장에서 이들이 산출한 개념과 예술작품은 공히 무한자 자체는 아니고 무한자의 알레고리이다. 즉 철학자가 행하는 개념 수립을 위한 노력과 예술가의 창작을 위한 수고에는 무한자 자체는 아니지만 ‘무한자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는 것이다.

 

3)“세계를 낭만화하라!”

슐레겔의 절친이자 사상적 동반자인 노발리스는 자신들의 주장을 저 유명한 지상명령으로 표현한다. 노발리스의 테제는 인간의 본성(nature)을 억압하는 산문화된 현실을 극복하고 자연(nature)의 역동성=인간 자신의 본성(nature)을 따르는 삶을 회복하자는 주장이다.

낭만주의에서 인간의 본성은 이미 살펴 본대로 ‘숭고의 감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인간의 본성규정인 ‘이성성(=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성은 숭고의 감정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성이 근본적인 인간규정이 아니라 ‘인간은 숭고의 감정을 지니는 존재’가 근본규정이 된다. 숭고의 감정에 토대한 이상의 추구가 철학으로도 예술로도 나타난다고 할 때, 인간의 이성성은 인간의 규정과 관련하여 근본뿌리가 아니라 철학과 연관된 하나의 가지일 뿐이다.

낭만주의자에 의하면 모든 학문과 예술의 공동적 토대는 이성이 아니라 숭고의 감정(=미감적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학문과 예술은 미감적인 것을 토대로 재편되어, 하나의 종합적인 학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노발리스가 내린 지상명령의 핵심이다.

자연은 신성의 표현이므로 자연학(물리학)은 궁극적으로는 신성에 관한 학, 즉 신학(종교론)과 종합되어야 한다. 철학과 예술 또한 종합되어 하나의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어떤 것은 아직 실현된 것이 아니므로 ‘철학의 철학’ 혹은 ‘예술의 예술(포에지의 포에지)’이라고 (잠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결국 낭만주의에서 ‘철학의 철학’과 ‘포에지의 포에지’는 다른 말이 아니다. 즉 감성과 이성, 직관과 개념, 포에지(예술)와 철학을 하나로 종합하는 것을 말한다.

4)낭만주의자는 이러한 철학적·문예론적 소신을 현실의 삶의 원리에도 적용시킨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최선’의 삶이 되도록 노력한다. 그 노력은 도덕과 종교로 나타난다. 슐레겔은 이와 관련한 논의를 칸트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칸트의 도덕론은 개인주의에 기반 한다. 또한 그의 도덕론은 도덕성의 실현과 관련하여 신을 불러들임으로써 종교론이 된다.”

슐레겔에서 도덕과 종교는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도덕과 종교의 과제는 사회(=공동체)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즉 낭만주의자는 인간의 도덕적 삶과 종교적 삶은 사회를 매개로 해서만 실현된다고 본다. 나아가 사회와 정치는 불가분리적이므로(사회와 정치는 모두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polis)’에서 유래한 개념) ‘정치’를 통해서만 인간의 도덕·종교적 삶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의 본성에 따른 사회적 형태는 역사적으로 가족(혈연공동체=자연공동체), 위계(교회공동체=정신공동체), 공화국(국가공동체=자연공동체와 정신공동체의 종합)으로 나타난다. 사회형태에 대한 이러한 역사철학적 인식하에 슐레겔은 정치를 통해 이루어야 할 가치(=이념)를 ‘자유와 공동체, 평등’으로 요약한다. 나아가 이 이념들을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정치)형태로 ‘무정부(Anarchie)’를 든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원한 이상이므로 ‘공화국’의 수립을 자기 시대의 과제로 제시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평가할 때, 슐레겔이 말하는 ‘공화국’은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와 가깝다. 이미 ‘대의민주정’하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슐레겔의 주장은 별 것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입헌군주정’의 수립정도를 과제로 내세우고 있음과 비교할 때 슐레겔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가장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보다도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서 도덕과 종교의 문제가 개인 차원의 과제가 아니라 공동체적·사회정치적 맥락에서만 실현가능하다고 본 것 자체가 혁신적이라고 하겠다.

슐레겔에서 자연본성에 따르는 삶이란 공동체(=사회)의 자유와 평등의 진작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다. 그것은 신성이 인간에게 부여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즉 그런 삶을 택할지 말지는 인간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다만 어떤 식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실현해 나갈지는 자유의사에 따른다. 이 의무를 자신의 과제로 여겨 분투하는 삶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유이다. 이런 삶이 명예로운 삶이며 사랑의 삶이다.

 

5)제한된 지면을 통해 낭만주의사상을 얼마나 제대로 전달하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의 사안들이다. 왜 우리는 어떤 사상을 공부하고 이해하려 하는가? 예술을 통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우리는 서구 유럽과 일본 등을 제외한 다른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유린당하고 외세의 총칼에 의해 강제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겪는다. 고통과 수모로 점철된 근대사를 뒤로하고 기적에 가까운 발전을 이루어가고 있으나 구미(歐美)와 비교할 때 비대칭은 여전하다. 비대칭이 가장 극심한 영역은 자연과학이나 공학 분야가 아니다. 오히려 인문사회과학 등을 포괄하는 사상과 예술의 영역이다.

어떤 사상과 예술이든 자신들의 삶에 대한 고민이며 그에 대한 해결방안이다. 우리의 처지는 아직은 구미의 그것을 흉내 내고 학습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구미의 유행에 따라 외래의 사상과 예술이 백화점의 상품처럼 유통되고 있다. 백화점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세계화의 시대라지만 시대적·공간적 차이를 간과한 시대착오적, 공간 착오적 추종은 벗어날 때가 되었다. 나 혹은 우리 없는 사상과 예술은 사상누각이다.

초기독일낭만주의에는 당시부터 현대에까지도 일부 이어지고 있는 ‘서구중심주의’가 없다. 그들은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상적·예술적 성찰과 그 결과물을 놓고 기꺼이 대화할 자세가 되어있다. 그들도 우리도 절대자를 손에 움켜쥐지 못하는, 무한히 추구해 나아갈 뿐인 평등한 존재이다.

1980년 광주 5·18의 트라우마. 그 광기어린 폭력의 기억과 그것의 일상화된 반복의 자각이 ‘맨부커상’이라는 ‘한강의 기적’을 낳았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1980년대 한국현실의 폭력성이 21세기 인류 보편의 문제로서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예술가, 예술이론가가 되고자 하는 한예종 학생들이여! 여러분이 처한 사회·정치적 현실을 자각하고 기억하시길. 그것을 형상화하고 문자화하시길. 모두가 맨부커상을 받을 수는 없어도 공동체의 자유와 평등의 진작에 나름의 이바지를 할 것이니 말입니다.

 

Novalis노발리스(Georg Philipp Friedrich Freiherr von Hardenberg. May 2, 1772 – March 25, 1801)

Novalis노발리스(Georg Philipp Friedrich Freiherr von Hardenberg. May 2, 1772 – March 25, 1801)

 

이관형

서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