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의 열기를 유지하는 가운데 사태를 사고하는 일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ISLAM AND MODERNITY)>, 2015
저자 : 슬라보예 지젝
번역 : 배성민
출판사 :글항아리
청구기호:

918 지73ㅅ 석관동도서관/5층 일반자료실
B 918 지73ㅅ c.2 서초동도서관/일반자료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

『법철학』 중 프리드리히 헤겔

 

2015년 새해 벽두, 프랑스 파리에서 수십여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1989년 크리스티앙 도르니에의 총기난사 사건 이후로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기억되는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그렇게 유럽의 새해를 열었고 이후 대륙에서 몇 차례 이어질 테러 사건에 대한 신호탄으로 작용한다. 어느새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사건 당시의 열기는 한층 사그러들었음에도 우리는 얼마나 사태의 진실에 접근해 있을까. 헤겔의 저 유명한 문구를 빌어, 우리는 황혼녘이 오기까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가 기억하는 이슬람은 적어도 테러라는 과격성, 히잡 그리고 조금은 낯선 알라라는 이름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이는 지리적 인접성에 비추어보면 자연 타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를 이유로 들어도 파리가 그리고 런던이, 뉴욕이 우리에게 느껴지는 친연성에 비하면 여기엔 다른 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지젝이 시도하고 있는 바는 적잖이 흥미롭다. 자유 민주주의 좌파의 시점에서 이슬람 경전으로 곧장 달려드는 그의 시도는 그 성공 여부를 떠나 적어도 우리가 그들을 대할 때 어떤 언어로 말을 걸어야 하는지,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단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사태에 대한 균형잡힌 진리에 도달하려는 이들이 오히려 진리의 날을 무디게 한다고 말한다. 하여 사태의 열기를 유지하는 가운데 사태를 사고하는 것이 어려울지언정 필요한 것임을.

 

슬라보이 지제크(슬로베니아어- Slavoj Žižek , 1949년 3월 21일-
슬라보이 지제크(슬로베니아어- Slavoj Žižek , 1949년 3월 21일-

 
다소 이른 듯하지만, 사건이 터진 가까운 시일내 쓰여진 이 책은 이러한 주장에 상당히 충실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이슬람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기에 이 또한 그가 인용한 호르크하이머의 주장―1930년대에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파시즘에 대해 논하지 말아야 한다던―에도 상당히 근접해 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그가 결국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그는 자유주의 좌파의 입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유주의 좌파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유주의 좌파를 비판한다?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입장이 사실 이 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책의 서두는 샤를리 에브도와 각국의 거물 정치인들이 보여준 역겨운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위선으로 가득한 행진, 각국의 정치인들이 손에 손잡고 행진하는 가운데 이에 감격한 시민이 그 유명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트는 꼴이란. 이쯤되면 쉴러도 베토벤도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걷던 유대인들이 부르던 것도 모자라 현대판 정치쇼에도 이 음악이 울려퍼지니 기구한 팔자 탓을 해야 하는 건지.
그들이 이런 퍼포먼스를 하는 가운데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옷 소매에 떨어진 새똥은 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겨운 의례에 대한 신의 응답이자 상징적 의례에 대한 실재의 응답”에 그대로 부합한다. 이처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측에서 보여주는 행태에 대해 이슬람은 어떠한 태도를 보여줄까.
사실 지젝의 시선에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주의자로 분류되기도 어렵다. 티베트 불교도와 미극 아미시 공동체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것과는 다르게 불신자의 생활 방식에 위협을 느끼는 그들은 오히려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들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고작 풍자 주간지에 실린 한심한 만화를 보고 위협을 느꼈겠는가. 그들은 “세계를 소비시장으로 만들려는 문명에 맞서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욕망에서 나온”것도 아니며 그들이 가진 신념이 너무나도 강해서 우월감 혹은 어떠한 확신에서 테러를 자행한 것도 아니다. 그러기엔 총구가 향해야 할 표적으로부터 한참이나 벗어나 있지 않은가.
이처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도 이슬람도 그릇되었다면 지젝,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서야 하는가. 여기에서 그도 우리도 결코 이슬람의 입장에 설 수 없다. 그럴 뿐더러 지젝은 그럴 생각도 없다. 그가 글에서 인용한 인도계 파키스탄 사상가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주장처럼 프랑스 혁명의 진정한 성취를 위해서는 이슬람국가가 도래해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대신 그는 이슬람 경전으로 곧장 들어간다. 그것도 경전의 공식 교리 이면에 있는 비사(秘史), 공식적인 상징 역사를 지탱하는 ‘외설적 타자’로 부터 접근해 들어간다. 이는 프로이트가 모세5경을 바탕으로 다시 구성하려고 했던 것을 이슬람 경전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도의 성공 여부는 여기에서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에 대해선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두겠다.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을 라캉과 제욱시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과 압둘라와 두 여인의 이야기에 대해 해석하는 부분은 여느 독자에게도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에세이가 다만 지젝과 정신분석이라는 굴절된 렌즈에 의해서 쓰여진 것일지라도, 그리고 베일 뒤에 무엇인가가 있을거라고 장담할 순 없음에도 베일 뒤에 가려진 이슬람의 단면을 엿보는데 하나의 흥미로운 시도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정의현 기자
sungwon7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