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현실 너머의 현실로

 

“괜히 말이 많았네요. 하긴, 세상 모든 일들이 모두 올바르고 낭만적으로만 해결된다면 누가 소설을 보겠어요?”

 

-키스 세자르, <SKT>

 

 

 

판타지는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장르물을 지칭하는 이름 중, 판타지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단순히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처럼 우리에게 진부하리만큼 잘 알려진 흥행작들의 영향만을 언급하려는 의미는 아니다. 우선, 우리는 판타지라는 말 그 자체를 파고들 때에는 장르물로서가 아니라, 일상어로서 ‘환상’이라는 의미를 가지던 판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주로 현실이 아닌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혹은 단순히 비현실적인 행위나 존재에 대한 상상이다. 이와 같은 상상들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특히 우리는 신화에 기반을 둔 예술품이나, 요정들이 사는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구전 설화들로부터 인류와 함께해온 환상의 존재를 명확히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포괄적인 판타지의 정의가 결과적으로는 장르로서의 판타지를 하나의 부분집합으로서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판타지의 집합 안에는 SF나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 그리고 신화나 구전설화까지도 존재하기에 이 안에서 장르로서의 판타지를 포착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판타지의 장르적 특질을 재규명해보는 작업을 통해 판타지라는 이름을 장르적 의미로서 재정의해 볼 필요가 있다.

 

장르로서의 판타지가 환상문학을 비롯한 기존의 포괄적인 환상으로서의 판타지 정의와 대비되는 점은 우선 환상으로서의 판타지가 단순히 작품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적 목적에서 가상의 세계를 사용하였다면, 장르로서의 판타지는 새로이 창조된 세계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이때 새로운 세계 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의 ‘설정’으로서 판타지의 장르적 전형을 설정하고, 또 이는 다음 세대와 또 다른 작품들을 통해 전승되어 하나의 클리셰를 만들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차이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비평가인 토도로프(Tzvetan Todorov)와 옥스포드 교수직을 지낸 언어학자이면서 동시에 판타지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작가 톨킨(J.R.R. Tolkein)의 정의를 비교해 보았을 때 더욱 확실해진다. 먼저 토도로프는 그의 저작인 <환상문학서설(Introduction à la littérature fantastique)>에서 환상, 즉 판타지에 대해 “자연의 법칙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분명 초자연적인 양상을 가진 사건에 직면해서 체험하는 망설임”이라고 말했다. 토도로프는 여기서 판타지가 현실의 일부로서 종속되어 있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세계 자체의 환상성에 대한 논의 없이 단지 사건 자체에서 보이는 ‘망설임’에 대해서만 논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톨킨은 판타지의 한 종류인 요정이야기(Fairy story)을 다룬 그의 저서, <요정이야기에 대하여(On Fairy-Stori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훌륭한 요정이야기의 작가는 독자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제 2의 세계(secondary world)를 만든다. 그 안에서 작가가 하는 말은 정당하다. 그것이 그 세계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잘 구성된 요정이야기는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현실’을 구비한 제 2의 세계를 제시해주며, 독자의 사물에 대한 관점을 회복시켜주며, 현실에 대한 편협하고 왜곡된 관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다.”

 

 

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
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

 

 

톨킨은 판타지의 세계 그 자체, 그 허구성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게 된 것이 바로 ‘제 2의 세계’다. 톨킨은 20세기 당시의 과학숭배주의적 모더니즘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 이전까지 진행되어온 미메시스 내러티브와 리얼리즘에서도 판타지는 언제나 ‘비현실적인’ 또는 단순히 ‘허황된’ 것으로서 그 가치가 평가절하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제 2의 세계’라는 말은 장르로서의 판타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 접근해본다면 톨킨 그 자신의 저작인 <반지의 제왕>이나 <실마릴리온>뿐만 아니라, <드래곤 라자>, <세월의 돌> 등 수많은 국내의 판타지 장르 소설들을 단순히 ‘문학적이지 않다’는 말을 들어가며 신춘문예를 비롯한 순문학의 아래로 종속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일 것이다. 결국, 장르로서의 판타지는 그것이 현실에서 벗어난 세계를 다뤘기에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미문학 연구자인 로즈메리 잭슨(Rosemary Jackson)은 판타지의 환상성에 대한 그녀의 저서, <환상성 : 전복의 문학(Fantasy : The Literature of Subversion)>에서 판타지를 지배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속박으로부터 야기된 결핍을 극복하려는, ‘전복’의 시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톨킨을 비롯하여 루이스(C.S. Lewis)와 르 귄(Ursula K. Le Guin) 등은 모두 당대에 지배적이던 모더니즘 내러티브에 대한 반발로서 판타지를 썼다. 판타지의 세계가 하나의 장르로서, 그러한 현실 밖의 이야기를 다루는 현실의 안티테제로서 가지는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그리도 숭고하게 발음되는 ‘문학’이, ‘예술’이 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판타지를 순문학의 틀에 맞출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기존의 테제를 ‘전복’함으로써 비로소 목격되는 것이 장르다. SF는 인간에게서 탈주함으로써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판타지는 현실을 전복함으로써 현실로 돌아온다. 장르는 그것이 장르로서 포용될 때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오로지 현실에 안주하여 그 밖으로 탈주하기를 멈추는 것뿐이다. 물론 갈수록 각박해지는 현실 속에서, 몰락한 출판 시장과 넘쳐나는 양판소들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를 목격하기 위해 현실로부터 탈주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 안에서 멈추는 순간 결국 판타지는 죽는다. 그러니 부디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새로운 ‘붉은 책’을 찾아 펴고, ‘브레스’ 없는 용과 ‘서클’ 없는 마법, ‘환생트럭’ 없는 도로를 상상하며 아직 개척되지 않은 땅을 향해 발을 내딛자.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한, 우리의 즐거운 환상은 결코 깨어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서동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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