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장르(1) – 장르와 인사하기, ‘볼티모어의 군인’은 어째서 총을 쏘았나

눈이 흩
나렸다. 싸락눈이었다.     

-「수다스러울 절」, 『더블』, 창비.
줄바꿈 오타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칼로 썰어서 나눈 듯한 문장. 단순히 의미 전달의 수단으로서 읽히던 문자들은 이 순간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획득한다. 이처럼 박민규는 문장의 재배치, 채색 등을 통해 각 장르만의 고유한 ‘재미’를 추구하고 ‘순문학’의 권위적인 관습을 넘어서면서, 현대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영화 데드풀(좌), 박민규 단편집 더블(우)
영화 데드풀(좌), 박민규 단편집 더블(우)

 

최근 들어서 히어로 영화가 화제다. <데드풀>은 7억 달러의 매출을 넘겼고,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는 예매도 하기 전에 온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히어로 영화가 화제가 되는 만큼,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주변의 시선도 여전하다. 특히 ‘상업적’이라거나 ‘주제의식이 없는 오락 영화’라는 말은 너무 자주 들은 나머지 물릴 정도다. 사실 이러한 비판들은 비단 히어로 영화에서만 나오던 말은 아니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 영화에서도, 그리고 <스타워즈>나 <아바타>와 같은 SF 영화에서도 이러한 시선은 그 정도를 달리했을 뿐, 언제나 영화의 끝에 꼬리표처럼 달라붙곤 했다.
매체를 영화에서 책으로 바꿔도 상황은 같다. 스티븐 킹과 같은 호러 소설 작가나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SF 소설 작가의 작품에는 어째서인지 문학이라는 말이 좀처럼 따라붙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소설가나 평론가들은 이를 단순히 상품의 지위로 격하시키기도 한다. 예술이 아닌 상품으로서 이 영화들은, 그리고 소설들은 소비되고 또 유통된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SF’, ‘판타지’, ‘호러’의 위치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을 ‘장르’라고 부른다.
장르라는 말은 ‘종류’라는 의미의 그 프랑스어 어원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듯, 특정한 관습 또는 양식에 기초하여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특징적으로 유사해진 작품들을 하나의 이름 하에 묶어낸 것이다. 판타지라면 으레 용이나, 검, 마법이 나오고 SF라면 로봇, 뇌, 우주선이 나오는 것이 바로 그 예시다. 이는 단순히 소재를 넘어서 플롯이나 주제로도 확장되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작품 간의 유사성을 담보한다. 그래서 SF나 판타지나, 로봇은 몇 번을 나와도 다시 나오고, 이는 용이나 마법사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혹자는 장르를 일종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생산되는 하나의 공업품으로 취급하며 따라서 그것이 상업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장르는 정말로 단순한 공산품에 지나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장르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 “와 이거 정말 교훈적이야”, “심오한 주제의식이야”라는 말 대신 짤막하게 “재미있어”라는 말을 내뱉곤 한다. 그리고 소위 고상하신 분들의 언어에서 재미는 오락이라는 말로 격하되고, 장르는 상업으로 격하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정말 옳은가? 만약 틀리다면, 장르는 과연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름도 고상한 ‘순문학’의 거장인 스탕달의 평론집 「라신과 셰익스피어」(1823)에서 장르의 이해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스탕달은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 작년(1822년), 볼티모어 극장에서 연극 「오셀로」를 보던 군인이 제 5막에서 오셀로가 칼을 들고 데스데모나에게 가는 장면을 보고는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저 저주받은 흑인이 백인 여성을 죽이게 둘 순 없지.’라며 총을 뽑아 오셀로 역의 배우를 쏴 죽였다.
이는 프랑스의 평론가인 앙트완 콩파뇽이 일명 ‘볼티모어의 군인’이라 부른 일화다. 콩파뇽은 여기서 군인이 배우를 죽이게 된 이유로 문학적 관습에 대한 몰이해를 꼽는다. 콩파뇽은 “아마도 볼티모어의 군인은 극장에 가 본 적도, 연극을 본 적도 없어서 다음 장면에 대한 예측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며  “문학은 예측이다. 연기자, 혹은 관객, 혹은 작가로서 문학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측의 체계 안에 스스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특히 콩파뇽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예측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고 자서전, 신문 또는 소네트를 읽을 때에도, 독자는 일종의 약속대로 정해진 전형을 따라 읽을 것을 예상 받는다. 콩파뇽에 말에 따르면 바로 그러한 문학의 전형과 약속, 예측이야말로 ‘장르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관습과 전형은 ‘상업성’이라는 말 대신 ‘형식미’라는 말로 치환된다. 소네트를 읽으려면 소네트의 4행·4행의 옥타브와 3행·3행의 세스테트를 알아야 하듯, 장르를 읽기 위해서는 각 장르의 특성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오해를 부르는 것은 언제나 각 장르의 특성에 대한 몰이해다.
‘안녕, 장르’라는 이번 기획의 제목은 바로 그곳에 초점을 맞춘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인사를 할 때, 우리는 흔히 서로의 이름을 먼저 듣게 된다. 이처럼 이름을 안다는 것은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그리고 누군가를 호명할 때 대상의 이름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이름을 통해서 그들을 인지하고, 그들과 소통하게 된다. 그것은 때로는 그림의 표제가 되기도 하고, 음악의 악곡명이 되기도 한다. 이름은 세상의 모든 곳에서 대상을 지칭하는 가장 함축적인 단어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장르는 무엇보다도 이름에 가장 민감하다. SF, 판타지, 호러 등 각 장르를 지칭하는 이름들은 그 자체로 해당 장르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콩파뇽이 말한 일종의 장르적 전형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며, 장르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앞으로 각 장르들의 이름을 살펴보며,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하나하나 말을 걸어 볼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더이상 낯설지 않고 친숙해질 때까지, ‘안녕, 장르’라고 말이다.

 

서동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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