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사람’이 된 사람, 김동현

본 글은 얼마전 세상을 달리하신 연극원

연출과 김동현 교수를 추모하여,

평소 각별한 사이였던 연극원 극작과

박상현 교수로부터 기고 받은 글입니다.

 

 

지난 겨울, 12월 11일이었다. 입시도 마무리되면서 한 학기도 마감되고, 한 주가 기우는 금요일, 일찌감치 해가 지고 있었다. 김동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아직 학교세요? 평창동에서 저랑 차나 한잔 하시죠.”

그와 나는 한 동네에서 세를 살고 있었다.

약속한 까페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그는 무표정했다. 지난 주 예술의전당에서 <맨 끝줄 소년> 공연을 끝마쳤고, 입시 출제와 채점, 면접 등을 치르느라 그간 몹시 피곤해 보였었다. 학교에 들어와서 첫 학기니, 정신을 못 차릴 만도 했을 것이다. 그는 간혹 복도에서 휘청거리거나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푸념을 기다리며 커피를 한 모금 했다.

“뇌에 종양이 다시 커지고 있대요.”

“……”

“바로 사직서를 내려구요. 후임을 빨리 구해야지요.”

“다시 수술을 받아야 하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손쓸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럼, 얼마나……?”

“며칠이니 몇 달이니, 그건 의미가 없대요.”

무슨 말을 할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원정이와 약속한 게 있어요. 만약, 만약 이게 재발되면 수술이든 약이든, 어떤 구제도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로요.”

그는 이제 시력을 잃을 것이고, 말을 잃을 것이고, 종양은 점점 더 뇌를 누를 것이다. 그렇구나. 그는 이제 연극을 할 수도 없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없구나.

아내가 데리러 온다고, 그는 나를 일으켰다. 빨리 후임 교수를 뽑아야 한다며…….

어둡고 차가운 거리로 나오며, 나는 몇 걸음을 휘청거렸다.

올 1월, 17일 저녁이었다. 손원정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저희 지금 올라가요.’ 때가 온 것인가. 나는 집을 나서 강남성모병원으로 향했다. 이어, ‘김포 도착해서 병원 가고 있어요.’

김동현과 그의 아내는 제주도 성산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박근형, 김태웅, 김선애 선생과 한번 찾아갈 계획이었는데, 일찍 서울로 올라갈 것 같다는 문자가 온 게 그제였었다.

그는 아내와 장인, 장모와 함께 응급실에 도착했다. 곧이어 노모를 모시고 두 동생과 조카가 달려왔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말을 하지 못했고, 눈은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의식이 있는 듯, 없는 듯 가늠되질 않았다.

응급조치를 마치고 새벽에야 그는 입원실로 올라갔다. 그의 아내와 동생들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 때 그의 눈이 정확하게 나를 붙잡더니 맞잡은 손에 꽈악, 힘이 전해 왔다.

2월 24일, 오후에 손원정에게서 문자가 왔다. 기침이 심해져 치료를 받을 거라고……. 그 동안, 입원실에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평창동 집으로, 다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그는 조금씩 조금씩 지워지는 듯했다. 눈의 초점은 점점 좁아졌고, 손아귀는 풀어져갔다. 그런 그의 곁을 원정은 절망과 사랑의 미소로 지켜 왔다.

오후에 병실에 도착해 보니, 그는 깊은 잠에 빠진 듯 했다. 그러나 안간힘으로 호흡을 유지하는 듯 숨소리는 몹시 거칠었다. 의사가 ‘이번 주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준비를 하라고 원정에게 말했다. 오후에서 저녁까지 후배들, 그의 극단 ‘코끼리만보’ 배우들이 속속 찾아들었다.

8시가 넘어 병실을 떴다. 때가 오기 전에 처리해 놓아야 할 일들이 많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설렁탕에 소주 한 병으로 늦은 저녁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와 책상 의자에 털썩 몸을 싣는데 전화가 울렸다.

다시 병실로 들어섰을 때, 그는 낯익은 카키색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고, 가슴에 모은 손에는 노란 장미꽃이 쥐어 있었다.

김동현과 나는 같은 해 연출로 데뷔했다. 1992년 11월 나는 ‘연우무대’에서 <해질녘>으로, 그는 12월 ‘작은신화’에서 <꿈, 퐁텐블로>로 연극을 시작했다. 첫 느낌은……낯선 젊은이의 낯선 감각이었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아래로 서강대학교 동문이었다. 그렇지만 서강대에서 ‘연극 좀 한다’ 하는 서강연극회나 신문방송학과 출신이 아니어서, 알 수 없는 차갑고 지적인 인상의 이 젊은이를 나는 한동안 멀찌감치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나 뿐만 아니라 연극계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소박하지만 세련된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고, 나는 그가 소리 시간 구성에 남달리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술자리가 잦아졌다. 그는 쓸쓸하거나 고민이 생기면 내게 전화를 했다.

1990년대 중반 그가 북촌창우극장에서 공연한 <맥베스>는 나를 제대로 매료시켰다. 나는 선배들에게 일부러 전화를 해 한번 보러 가라 권하기도 했다. 이 ‘맥베스’는 이후로 그가 <맥베스, 더 쇼>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 더 공연하기도 했다. 그는 이들 작품에서 현대문명의 상징적 오브제들을 소품 삼아 원시적 야망의 노리개가 된 맥베스의 허무한 실존을 씁쓸하게 보여주었다.

1997년 우리는 <키스>를 했다. 윤영선의 희곡을 김동현, 박상현, 이성열이 각각 연출하기로 했다. 김동현은 텍스트에 충실하게, 이성열은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멀티플 키스’로, 나는 프랑스에서 갓 귀국한 남긍호를 내세워 1인무언극으로 만들었다. 혜화동1번지에서 초연한 이 공연은 이듬해 문예회관소극장(아르코소극장)으로, 그 다음 해에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으로 전진해 갔다.

1999년 김동현과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문사 과정에 들어갔다. 만학이긴 했지만 이미 학교에는 이원종, 위성신, 이수인, 김태웅 등 늙은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2000년 여름, 연극원 공부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나며 나는 김동현에게 오랫동안 쓰고 고쳐 온 <405호 아줌마는 참 착하시다>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2002년 가을 귀국에 즈음 해 그는 <405호……>를 공연했다. 마치 내게 보여주기 위해 때를 맞춘 듯이…….

<고래가 사는 어항>(2000)과 <눈 속을 걸어서>(2003)과 같은 철학적 동화를 만든 후 김동현은 <생각나는 사람>을 내보였다. 그가 주도적으로 구성한 공동창작으로, 후에 배삼식이 재창작에 가담하기도 했던 이 텍스트의 창작과 공연은 그의 연극 인생에서 가장 공들인 작업이 아닌가 싶다. 희미한 음각화를 보는 듯, 애처롭고 서늘한 정서를 품은 이 작품은 이후 <착한 사람 조양규>라는 제목으로 세 차례 더 공연되었다.

2009년 <다윈의 거북이>를 시초로 스페인 작가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의 작품들을 우리에게 소개한 것도 그가 한 큰 일 중 하나였다. 인간 폭력의 역사를 때로는 재치 있는 비유로, 때로는 우울한 회고풍으로 보여주는 작가는 이후 <영원한 평화> <천국으로 가는 길> <맨 끝줄 소년> 등 신작을 쓸 때 마다 바로 그에게 보내곤 했다.

김동현은 2005년부터 3년 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부예술감독 직을 맡아 김광림 예술감독과 세계를 나누어 다니며 수준 높은 작품들을 끌어왔다. 2011년 한 해 국립극단 상임연출로 활동했고, 2015년 가을에 연극원 연출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는 단 한 학기를 재직했지만 이미 오래 동안 연극원 학생들을 가르쳐 오고 있었다.

이 기간에 그는 <하얀 앵두> <그을린 사랑> <33개의 변주곡> <The Author> <벌> <말들의 무덤> <템페스트> <먼 데서 오는 여자> 등을 공연하였다. 나의 소개가 새삼스러우리 만치 관객과 평단의 박수를 받은 작품들이다. 그는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성기는 또한 그의 뇌종양 투병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성기의 뒤안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병마는 그의 삶에 돌연 마침표를 찍어 버렸다.

빈소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와 울고, 술 마시고, 떠들고, 웃다가 다시 울었다. 사람은 죽은 후에 다시 알 수 있다더니 – 그의 아내 손원정이야 아니겠지만 – 남겨진 가족들은 그의 연극과 삶이 어떠했는지, 모여드는 조문객들을 보며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6년 2월 27일 아침 병원을 나선 그의 육신은 혜화동성당에서 성령의 씻김을 받고, 혜화동1번지에 잠깐 들른 후 석관동 교정을 한 바퀴 돌고 나서 화장장으로 갔다. 작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 그는 용인천주교묘원에 안장되었다. 납골함이 봉인되기 전에 만져 본 항아리에는 아직 사람 체온만큼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가 용인의 산비탈에서 첫 밤을 보낸 그날 바람은 몹시 거세고 차가웠다.

그가 가고 한 달이 채 안 돼 봄이 성큼 다가왔다. 간지러운 봄볕과 들적한 봄바람에 머리가 어찔한 오늘도 교정에는 젊은이들의 재잘거림이 새 소리 같다.

김동현 선생, 그대 영혼은 지금 어디 만큼 갔는가. 저 하늘로, 우주로 흩어져 가고 있는가.

 

좌로부터 손호성(무대미술가), 박은희(피아니스트), 이상렬(청운대 총장), 김동현, 이성열(연출가) 2014년 여름 한 때...
좌로부터 손호성(무대미술가), 박은희(피아니스트), 이상렬(청운대 총장), 김동현, 이성열(연출가) 2014년 여름 한 때…

 

박상현(극작가, 연출가, 연극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