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드 나인>에 대한 기록

해방공간의 환각과 오르가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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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우드 나인: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미지의 세계의 소포클레스

카릴 처칠(Caryl Churchill)의 희곡 클라우드 나인(Cloud Nine)을 원작으로 한 <클라우드 나인: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연출 문재호, 2015. 11. 26-28.)는 그동안 한국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극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낯설지만 어딘가에 존재했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극은 복잡하지 않은 2막이지만, 이 두 개의 막은 거대한 장벽으로 뒤덮여있다. 1막은 빅토리아 시대(본 극에서는 일본제국)를 배경으로, 2막은 제국이 붕괴된 이후의 해방공간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본 작품은 제국의 안과 밖에서 성 권력의 이동과 변천, 붕괴와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염원함과 동시에 동시대의 문제를 그려낸다.

 

이 연극은 먼저 하얗고 거대한 커튼이 반원 형태로 무대를 감싼 상태에서 은밀한 제국의 내부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대의 중앙에서 보이는 가족의 형태는 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단단한 체계와 집약적인 권력을 지시한다. 1막에서 주된 화자이자 사실상 극상에서 예외적인 위치에 있는 재국의 가족 소개는 극 중 인물들의 위치를 지시함과 동시에 이 극의 고전적 성격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연극이지만, 1막은 어떤 극보다도 고전적이고, 서사적이며,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기존의 소포클레스적 서사를 충실히 이행한다. 가령 인물을 소개하는 와중에 ‘시민’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장모나 가정교사 노리코에 대한 설명을 건너뛴다든지, 술래잡기를 통해 그들의 역학관계가 소개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암시하는 것은 이 작품이 세익스피어나 체홉의 희곡에서처럼 파멸에 대한 도착적인 희열에 빠진 것 같다는 착각을 들게 한다.

 

그중 1막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각 인물간의 대화가 일어나는 도중(히로시와 수혁, 장모와 옥선, 조부인과 재국, 김군과 옥선)에 투명한 커튼 사이로 지나가는 은밀한 내부자는 이들의 도착적이고 자아도취적인 파멸을 바라보는 관찰자이자, 초대받지 못한 틈입자이다. 가령 김군이 지속적으로 무대 뒤를 배회하며 옥선과 히로시, 그리고 노리코의 관계를 살피거나, 끊임없이 여성들의 주변을 배회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권력 체계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전적 서사를 방해하고, 관객에게 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는다. 이러한 역할은 커튼이 젖힌 2막에서 1막 재국의 역할을 한 배우가 2막에서 정서불안을 보이는 여자 아이의 역할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데, 이러한 서사의 안과 밖, 무대의 안과 밖이 교란되는 순간은 이 작품의 미덕을 돋보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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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우드 나인: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미지의 세계의 소포클레스

아이러니하게도 1막의 굳건한 봉건적 체계는 결혼식이라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정점에서 붕괴된다. 이는 무대 가장자리를 배회하던 김군이 처음으로 무대의 중앙으로 이동하면서 벌어진다. 그렇게 암전된 무대에선 The Doors의 <The End>가 흘러나오고, 배우들은 1막의 허물을 벗는다. 이때 굳게 닫혀있던 커튼이 열리며 2막의 옷들이 걸린 행거가 들어오는데, 열린 커튼 아래로 행거에서 옷을 꺼내 입는 배우들의 모습은 이 공간이 ‘옷을 갈아입는’ 쇼룸(show room)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배우들이 하나 둘 옷을 입고 나면 분장 디자이너들이 무대의 중앙으로 나와 몇몇 배우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분장하고, 배우들은 1막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시작된 2막은 제국주의적인 가치가 완전히 상실된 일종의 해방공간이 된다.

 

일반적으로 제국이나 식민지의 붕괴 이후의 윤리적 가치관이 상실된 공간을 해방공간이라 칭한다. 여기서의 해방은 기존의 억압과 봉건적 질서의 철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기존의 가치규범이 말살된 아무것도 없는 아이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 2막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우울증과 히스테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민영(1막의 노리코, 선화)이와 그의 딸 지우 (1막의 재국)다. 제국의 규범과 질서를 유지하던 재국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온갖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1막의 수혁은 2막에서는 자신의 어머니를 연기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공백 상태를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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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우드 나인: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2막은 1막에 비해 매우 느슨하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포스트모던한 극이 되어버린다. 이로 인해 활짝 열린 커튼과 1막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실외공간은 그저 텅 빈 벤치 하나만 덩그러니 남은 황폐한 공간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텅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난교로 보이는 제의의식을 통해서 각자의 성 역할을 모두 탈의한 채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동시에 과거의 인물들을 다시 무대로 소환하며 아나크로니즘, 즉 엇갈린 시간의 동조를 통해서 과거의 현재의 교차를 시도한다. 이 두 가지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 극이 기본적으로 1970년대에 쓰인 원작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히피나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은 느슨한 지점을 봉합하지 못한 문제도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2막에서 극 중 인물들이 그려내는 새로운 가족계획과 주거형태는 히피들의 공동체를 그대로 닮아있다. 그래서 그들이 제의의식을 통해서 구시대를 잔재를 추모하고 한바탕의 장단을 마치고 보여주는 새로운 공동체는 역설적으로 지금 시대에는 그들이 제의를 통해서 추모했던 잔재처럼 역시 또 하나의 박제된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극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즘과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 밀도 있는 성찰을 거쳐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성 소수자나 여성에 대한 재현이 희극적이라 불편하다는 점은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블랙코미디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물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고, 성소수자나 여성 문제를 반드시 진지하게 풀어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취향의 호불호는 될 수 있지만, 좋은 비판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성 역할이나 문제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 어떤 윤리적인 문제나 실패를 담고 있는지도 전혀 공감할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이 글에서 묻고 싶은 것은 과연 윤리적으로 성공한 극이 있냐는 점이다.

 

해방공간 이후의 새롭게 구성된 질서와 규율은 더욱 은밀하게 극의 안과 밖을 침투하고 있다. 이제 무대는 동시대의 환각과 오르가즘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2막 후반부에 고백하는 옥선의 오르가즘의 대한 고백은 제국 이후의 여성들의 오르가즘을 될 수 있지만, 1막과 2막에서 예와 지금을 오가는 민영과 노리코, 조 부인에게 진정한 해방과 오르가즘을 주고 있을까? 그리고 2막의 게이와 레즈비언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은 과연 진정한 환각상태를 경험하고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현재진행형이자, 배우들이 치장과 허물을 벗고 무대를 떠나는 순간에도 지속되는 질문일 것이다.

 

<클라우드 나인: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올해 젊은 연극 중에서 하나의 눈여겨 볼만한 화두와 지적인 질문을 남긴다.

 

한대호

동시대 문화예술에 관심을 두는 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