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도서관 자료—『에로스의 종말(Agonie des Eros)』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면서 사랑을 생각한다. 어디쯤에서 우리는 사랑을 잊었고 사랑을 잃어버렸는지. 저자 한병철은 이 책에서 사랑이 불가능하게 된 지점들과 상황을 하나하나 규명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는 사랑을 다시 복권하고 온전한 위치에 부여하려 한다. 상당히 얇은 이 책에서 고대 플라톤에서 헤겔을 경유해 레비나스와 부버에 이르는 사랑의 거대서사는 오늘날 사랑이 어디에 직면했는지, 현상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Agonie des Eros(에로스의 종말) 외국 판
Agonie des Eros(에로스의 종말) 외국 판

 

 

멜랑꼴리아(melancolía)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소비사회가 타자의 존재가 사라지고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1적 차이로 대체되는 과정으로 현 상황을 보여준다.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점점 강화되어가는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타자에게서 우리를 재확인할 뿐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주고, 여기서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ego)를 확인해주는 거울로 전락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자기 자신을 향한 침잠 과정. 이 과정은 결국 성공 우울증으로의 귀결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일상에서 페이스북이나 SNS를 통해 올라오는 다양한 삶의 군상들을 본다. 개중엔 오감을 자극 하는 음식과 삐까뻔적한 소비재들로 넘쳐나지만, 한편에선 여행과 성취로 메워진 모습들도 넘쳐난다.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해 보이려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시도. 이 과정에서 타자는 우리 자신의 성취나 현시를 입증하는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하지만 수많은 ‘좋아요’와 댓글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우울해지는 건 피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저자는 나르시시즘적인 질병으로 우울증을 진단하고 우울증의 대척점에 에로스를 둔다.

 

 

할 수 있다!? 긍정성이 만연한 사회

성과사회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할 수 있다’며 내몬다. 불가능이 사라진 시대, 부정성은 제거 돼야 할 대상으로 끊임없이 긍정성을 예찬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이 끝없는, 우리의 자유와 자발성에서 비롯된 듯한 ‘할 수 있다’의 긍정성의 세계는 어느새 우리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이제 주인이 노예를 착취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는, 자발성과 동의의 이름으로 주인과 노예가 일치하는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삶을 기획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이러한 주인-노예가 주를 이루는 사회에선 사랑조차 성애Sexualität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폭되어야 할 자본이 되고,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소비 대상으로 전락한 타자는 성적인 대상들로 파편화되고 하나의 인격성조차 갖지 못하게 된다. 인격성을 상실한 유령들이 배회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24시간 카카오톡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지만 기술에 의해 가까워진 거리만큼 우리는 서로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메시지를 즉각적으로 받으면 받을수록 그럼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이 고립되고 고독해진다.

 

 

포르노의 범람

사랑의 비속화 내지 전락은 긍정사회에 우울증 환자를 낳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매체의 발달이 급격하게 확산시킨 포르노의 범람은 넘처나는 섹스 속에서 사랑을 아예 사라지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벤야민을 떠올리게 된다. 성적인 것이 전시대상으로 전락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타자를 내 가까이로 끌어오려는 오늘날의 사회는 이미 벤야민이 지적하였듯이 사회가 기술복제 시대로 이행하며 예견된 바인 것이다.

 

사물을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와 같은 경향을 다소 무비판적으로, 아니 긍정적으로—아우라의 붕괴와 사진·영화에 대한 찬사는 그것이 예술의 정치화라는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기술한 점—바라보는 벤야민의 시각은 타자의 상실이라는 오늘날 한병철이 진단한 사회를 예견하고 있다. 우리는 기술복제를 통해 음악을 미술 작품을 우리 삶 가까이로 끌어 당기듯이 타자를 우리 가까이로 끌어당긴다. 일회적·동시적 만남을 가능케 했던 예술 장르조차 외면받고 주체의 계획 속에 예술은 소비 대상으로 그리고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플레이 될 수 있는 대상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은 최적화된 삶 속에 사랑마저 성과 원리에 지배받아 하나의 경영할 대상으로 전락케 하고 주체의 계획 속에 자리 잡게 만드는 것이다. “정해진 근무 시간, 명료하게 정의된 업무, 성과의 질을 보장해주는 철저한 방법을 갖춘 일자리”,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여주인공의 파트너가 주인공과 관계를 이처럼 생각하는 것이, 그리고 이에 대해 여주인공이 어리둥절하는 것이 비단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기술복제 시대는 예술 작품에서 제의가치를 밀어버리고 전시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과정 속에 사랑과 성(性)마저 값으로 환원될 수 있는, 동일한 대상으로 균일화해 버렸다. 저자는 말한다. 전시가치가 우월해진 사랑이 다시 제의가치를 회복할 것을.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서만, 사랑을 통해 대상화될 수 없는 타자의 타자성을 발견함으로써만 우리가 자기 자신의 고립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해지지 않는 지점을 발견한다. 저자는 나르시시즘이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그저 ‘세계를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만 파악’하는 것으로 비판하지만, 자기애를 지닌 주체를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를 확정’하는 이로 표현하여 이 둘을 구별한다. 그러면서 이후의 논의는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한계를 말하는 것으로만 논의를 전개하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는 ‘자기애를 지닌 주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저자 한병철은 이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지 않지만,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과정 속에서 더욱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리하여 타자를 배제하게 되는, 창조적 과정에 몰두하는 혹은,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들의 삶의 경우에도 말이다.

 

정의현 기자

 


1 ‘다른heteros’과 ‘장소topos’의 합성어로서 미셸 푸코가 고안한 개념. 유토피아가 문자 그대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공간이라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가 통용되는, 현실 밖에 있지만 동시에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성소, 금기 구역, 정원, 묘지, 정신병원, 요양원, 병영, 박물관, 극장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