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로 살아남기—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

“고래는 지구에서 가장 큰 생명체다. 고래는 인간이 갈 수 없는 바다 속 깊이까지 들어간다. 심연 속에서 인간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보고, 인간이 듣지 못 하는 것을 듣는다. 고래는 멸종위기에 놓여있다.” 극단 ‘고래’를 소개하는 문구다. 그는 연극을 통해 인간의 심연을 본다. 주목하지 않았던 고통들이 연극이라는 매개를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난다. 고통은 이야기할 때만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쉽게 자각하지 못 하는 고통 중 하나가 청년들의 고통이라며 주목했다. 극단 고래의 대표인 이해성 씨는 청년예술가에 대해서 “당연히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게 생각하는 것처럼 내 삶을 집어삼키진 않는다”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했다. 배우, 각본가, 연출자. 청년시절을 온전히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데에 몰두했던 그가 청년예술가들에게 말한다.

 

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 (사진: 문지우 기자)
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 (사진: 문지우 기자)

 

문학을 전공했는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으로 지원했던 것인가.

원래 중학교 때부터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어렸을 때는 감독이 되려면 시나리오를 써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어국문과를 선택했었다. 연극영화과를 고려하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해당 전공이 지금과 달리 소위 ‘딴따라’ 취급을 받는 등 인식이 대단히 좋지 않아 부모나 선생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한 게 국어국문과였다. 시나리오를 써서 감독이 되자는 식이었다. 학교에 들어가 동아리를 선택할 때도 영화와 가장 가까운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연극부를 선택한 것이다. 연극을 한다고 해서 영화쪽으로 가지 못 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막상 연극을 하다보니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삶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웃음) 선배들이 허우대가 멀쩡하다며 연기를 시켰고 그렇게 한 작품씩 참여하다보니 계속해서 배우의 길을 가게 됐다. 인연이라는 것이 재밌는 게 제대 이후 복학을 앞두고 있을 때, ‘가마골소극장’에서 이윤택 씨가 연출했던 작품을 보고 귀가하던 중 거기에 출연한 정동숙 배우와 만나게 됐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고 학교에서 연극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극단에 한 번 놀러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극단에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이런저런 제안을 받으면서 휘말리다 보니 어느새 종내에는 주연배우까지 하게 됐다.

 

 

배우에서 다시 연출이 되었던 계기가 무엇인가.

글에 대한 욕구는 계속해서 있었지만 배우의 길과 멀어지게 됐던 것이 큰 원인이 됐다. 부산에서는 나름대로 배우로서 성공을 거두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연기를 인정도 받고, 김광보 연출자의 작품에 출연했던 것이 부산에서 흥행 기록들도 깨며 대박이 나기도 했다. ‘연희단거리패’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연기자로서 조금 기고만장해진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복학을 해야할 시점이 찾아왔다. 이윤택 선생은 복학을 더 미루고 공연을 하자고 했지만 졸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렇게 ‘연희단거리패’와 조금씩 멀어졌고 서울에 있는 동안 함께 연극했던 동료들이 다 나가버린 바람에 다시 돌아가기도 애매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서울에 오면서부터 연기의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표준어가 문제였는데 말의 뉘앙스를 포획하지 못 하니 연출과의 소통도 어긋났다. 말에서부터 자유로워야 하지만 그 안에 갇히면서 연기가 더 발전하지 못 한 채 맴돌았다. 배우라는 길에 절망하게 되니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욕망이 다시 뚫고 올라온 듯하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글을 쓰고싶었던 마음은 끊임없이 있었다. 94년도에 상도 받았었고, <고래>의 초고를 썼던 98년도는 배우로서도 나름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갈증은 사라지지 않고 꿈틀거려왔는데, 여러가지로 상황이 안 좋아지다보니 결국 글에 올인하기로 했다. 결정을 하고나서는 몇몇 옷가지와 이불, 배게 그리고 특별히 필요한 필수품들, 가령 손톱깎이 (웃음) 등만 배낭에 싸 집도 처분한 채 떠돌았다. 나를 옥죄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실제로 다 버리고 나니 굉장히 자유로워졌다. 일종의 텅 빈 충만함이었는데, 그렇게 일 년을 지내고 다음 해에 <남편을 빌려드립니다>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면서는 무언가를 이루어낸 성취감보다 이제 첫 단추를 꿰었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던 듯하다.

 

 

극단을 만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극단 ‘백수광부’에 있을 때 워크숍으로 <고래>라는 작품을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다. 이성률 선배가 정기공연으로 올려주고 연출까지 나에게 맡겨주었다. 저예산이었지만 흥행이 되어 사후지원금을 받아 박근형 연출로 앵콜공연까지 치룰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또 다른 각본들도 의뢰를 했지만 연출을 맡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때 그 연극을 반드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극단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연출의 경험도 있던 터라 자신감이 있었다. “시기적으로 이르지 않냐”며 조언도 받았지만 그때 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2010년에 극단 등록을 하고 2011년에 창단 공연을 올렸다. 연출을 안 해줬을 때는 그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좋은 계기를 마련해준 듯하다. 초연을 할 당시 단원은 나와 현 부대표 두 명이었다. 초연의 제작비는 1,600만원 정도였는데 사비를 내서라도 제작을 감행했고, 게런티 없이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기도 했는데 다들 많이 도와주었다. 초연으로 올렸던 <빨간시>가 성과가 좋았고 대박이 났다. 그 작품을 통해서 이름이 좀 알려지면서 2012년도에 단원모집을 했다. 그때 1기로 들어온 사람들이 12명이다. 창단하고 나서는 세 작품을 연작으로 대극장 공연을 하게 됐다. 신생 극단 치고는 운이 좋았다.

 

 

극단에 속해있는 것과 극단 대표가 된다는 것은 조금 다를 것도 같다. 이를 테면 극단 대표로서 제작과 관련된 부분들, 투자를 받는 등의 일을 하면서 오는 괴리감이 있는가.

많다.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극단에는 크게 네 가지 직분이 있다. 작가, 연출, 배우, 그리고 제작자. 제작자의 역할은 만만치가 않다. 지원서를 쓰고 제작비를 따오고 하다못해 때로는 술상무 같은 역할까지도 해야 한다. 극단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글을 쓰고 연출을 하고 거기에 제작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거의 하루도 쉴 날이 없다. 일 년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지원제도에 맞추어 심사를 받는 시간을 갖는다. 그럴 때마다 ‘이런 일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하는 심리적인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데 일정 부분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것도 내 일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처음에는 기획자를 따로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일을 덜어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요즘은 연극의 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내가 연극이라는 작업을 하지만 결국 실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극단에서도 예술활동 이외에 공연을 위해 자본과 얽히는 것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는 거라 인정했다. 어차피 내가 하고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밑바닥에 깔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니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에서 예술을 전공으로 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가.

현실적으로 대단히 힘들다. 예술을 선택하는 순간, 자발적 가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모두가 알지만 그걸 본격적으로 체감을 하면서부터는 엄청나게 갈등을 한다. 그 갈등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어느 순간 그 자발적 가난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부터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일종의 텅 빈 충만함이다. 그렇게 자본의 논리로부터 나오게 되면 그동안 놓지 못 했던 물질적인 것들은 정말 작게 느껴진다. 이 가치야말로 계속해서 지켜나가야 한다. 물론 예술계에 있는 자본과 권력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은 못 하겠다. 내가 많은 부를 누리는 상황을 겪어보지는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필요할까 생각하면 굳이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되려 내면의 평화나 정신적인 만족 같은 것들을 위해서 덩어리가 큰 것들은 좀 깰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청년예술가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

많은 질문들을 받는데 그것들은 대개 두 가지로 귀결된다. 재능에 관한 것과 생계에 대한 것이다. 나 역시 아직 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지만 지금까지 과정을 종합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재능에 관해서는 본인이 선택한 길을 끝까지 가는 그 의지 자체가 재능의 일부라고 본다. 벽에 부딪혔을 때 돌아가든 뛰어넘든 그 벽을 파서 뚫고 지나가든 벽을 통과하겠다는 의지, 그런 어려운 상황을 버티는 힘이 바로 재능인 것이다.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시기 차이는 조금 다를 것이다. 하지만 빨리 인정받는 것이 결코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충분히 익은 상태로 인정을 받는 것이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생계에 관한 면에서 생각해보면, 보통 좋은 학교를 나와서 대기업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마흔 중반에 다 명예퇴직을 한다. 그 이후로는 굉장히 힘들게 삶을 개척하거나 늦은 시기에 실존적인 고민을 안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예술을 하는 이들은 그전까지는 다소 어렵더라도 마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가 꽃이 피는 시기다. 그때까지 버티고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일종의 역전을 이루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하고싶은 일을 접고 자본의 논리를 따라갔던 사람들도 결국 그 시기에 본인의 실존과 맞닥뜨린다. 사실 두려움은 실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가치관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 기사는 <2015 청년예술가 일자리 프로젝트>(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예술분야 취·창업 교육 및 컨설팅 프로그램(‘Mini Job;說[미니잡썰]’)과 연계된 프로젝트 인터뷰다. 잡썰은 예술전공생에게 예술분야별 진로에 대한 정보와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됐다. 12월 2일 (수) 7시 우리 학교 석관동캠퍼스 강의동 L114에서 열리는 본 강연에서는 강연자로 선정된 이성래, 이해성 씨 를직접만나볼수있다.

 
서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