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러의 미학 (2) 미적 국가와 미적 교육론

유희 충동

미적 상태는 우리 능력상 매우 특이한 충동으로 드러난다. 쉴러는 이를 ‘유희충동’이라 부른다. 여기서 유희는 단순히 논다는 뜻이 아니다. 유희는 자유를 누리는 순간이며, 인간 능력의 ‘확장’(15: 87) 과정이다. 이런 인간 능력의 확장을 통해 인간의 온전함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 충동은 감각 충동에서 받아들인 구체성을 작위적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희 충동은 특별한 형태의 ‘통합’이다. 이런 통합 능력은 아름다움에서 나오며, ‘살아 있는 형성력’(lebende Gestalt)으로 묘사된다. 스스로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힘이 발휘될 때 인간의 위대성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인간인 경우에만 유희하며, 인간은 유희하는 한에만 온전한 인간”[15번째 편지]이라는 쉴러의 말은 아름다움이 갖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매우 특이한 역할을 한다. 쉴러는 그 역할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름다움은 (반성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지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우리 주관의 상태이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을 가지기 위한 조건이 감정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므로 형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느끼므로 동시에 삶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름다움은 우리의 상태이며 동시에 행위이다.”[25번째 편지] 유희 충동은 아름다움을 자기 자신의 삶의 태도로 바꾸어가는 과정이며, 새로운 인간 삶에 대한 투영 과정이다. 아름다움은 세상을 바라보는 상태이면서 행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확장 과정이다. 유희 충동이 일종의 통합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각 개인의 미적 상태는 동시에 상호주관적인 영역에서 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이다. 자연적인 대상에 대한 유희 충동은 각자의 세계에서 형성된 의미를 문화적으로 투영하는 중간과정의 능력이다.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쉴러의 강조점은 이런 문화의 중요성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미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면에는 문화의 역할과 맞닿아 있다. 그에게 문화란 물리적 삶에 굴복한 사람들을 지칭하지 않는다. 문화란 물리적 삶의 단계를 넘어 자기 자신이 만든 형식에 따라 삶을 개척하는 사람들의 행위들이며 따라서 아름다움을 자기 삶의 잣대로 삼는 사람들의 세계이다. 예술의 소명이라 할 문화의 목표는 물리적 삶에 종속된 인간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해방은 “도덕적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쉴러의 해방은 미적 해방이다. 그것은 숭고한 것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숭고함이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에서 얻은 것, 즉 특정의 대상에 대한 좋고 나쁨의 판단 기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 기준을 벗어나는 것은 편견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예술은 우리 경험의 한계를 넘어 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형식을 갈망한다. 예술의 목표는 이런 갈망을 통해 새로운 삶의 목표를 찾아내는 것이다. 상상력은 이런 인간의 힘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새로운 형식을 시도한다. 인간의 유희 충동은 이런 상상력의 소산이다. 인간만이 유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예술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이 새로운 형식,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희 충동이 없다면 인간은 그저 욕망의 노예가 되거나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의 발견

예술의 자유로운 삶은 세상 사람에 대한 쉴러의 평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세상 사람들은 무기력하다. 야만적인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원인이 무엇인가? 쉴러에 따르면 야만과 무기력은 감각 충동에 종속된 인간의 모습들이다. 물리적 삶에 대한 제약을 벗어나면 날수록 인간은 본연의 야만성과 무기력에 빠지고 만다. 물리적 삶에 노출된 인간 정신의 특징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인식은 그들의 세상 경험에서 얻어낸 것이고,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기지 않는 한,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정신을 향유 하지 못하게 한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과 근심, 타인이 행여 그것을 빼앗을까 하는 근심에 시달린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정신의 피폐 현상이 유독 심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쉴러의 처방은 자기 자신의 진정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 진정성이란 자기 삶에 대한 목표를 스스로 세우고 나아가는 삶이다. 자기 자신의 온전한 삶에 대한 관심은 자기 주변의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계기이다. 이를 위해서는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아름다움과 예술은 무엇보다 감각 충동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요구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세워야 한다. 아름다움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 자기 자신의 경험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형성한다. 신과 같은 삶이 인간 세계에도 가능하다. 자기 한계를 벗어던지고 자기 자신의 진정성을 찾는 것은 숭고를 통한 통합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가상과 세계의 대립

미적 상태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나타나는 계기이다. 미적 상태란 자기 경험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 경험에 포섭되어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미적 상태는 세상 사람이 규정한 의미에 자기 자신의 경험을 대립시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적 상태는 대립상태를 뜻한다. 쉴러는 이런 대립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 매우 특이한 형태의 존재적 함의를 지닌 용어를 만들어낸다. 이 말은 가상(Schein)으로, 헤겔 미학 논의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얻게 된다. 가상은 경험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유희에서 얻은 자기만의 존재이다. 이때 가상은 고의적인 속임이라는 기만의 뜻이 아니다. 쉴러가 말하는 가상은 미적 가상으로 기만을 뜻하는 논리적 가상과 다르다. 미적 가상은 논리적 가상과는 다르게 자기 경험을 통한 새로운 것의 형상을 뜻한다. 실제 경험에는 아직 없지만 경험의 반성에서 얻어낼 수 있는 통찰력, 전체적인 의미 같은 것이다. 이것의 존재적 위상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재가 될 수 없지만, 의미론적 시각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유희 충동의 산물은 가상의 성립이다. 자기 체험의 반성적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가상의 정립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 공간을 설정하는 셈이다. 이 삶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자기 자신을 음미할 수 있는 삶”의 조건과 같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삶에서 아름다움이 차지하는 역할도 이를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쉴러에 따르면 “아름다운 예술의 본질은 가상”이며, “미적 가상을 경멸하는 것은 모든 아름다운 예술을 경멸하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26번째 편지]. 예술은 삶에 대한 모방이다. 그런 점에서 유희 충동의 본질은 타인의 삶에 대한 모방, 새로운 삶에 대한 모방이다. 쉴러가 강조한 미적 교육은 삶의 모방이 곧 자기 자신의 삶, 나아가 전체 인간성 회복의 유일한 길인 것이다.

 

예술교육은 각자의 물리적 조건에서 벗어날 힘을 고양한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진정한 소통과 공존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로움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주는 과정이다. 진정한 세계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좁은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 이른바 사적 이해에 갇힌 세상은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할 공적 공간이 소멸되고 만다. 아름다움, 유희 충동은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자유이다. 동시에 자연적 조건을 벗어난 자유는 또 다른 자유, 자신의 삶이 반영되면서 타인과 공존하는 자유를 모색한다. 반성의 힘은 이런 자유를 제공한다. 플라톤의 언어를 모방한 ‘아름다운 국가’는 이런 자유로운 자들의 결합인 것이다.

 

 

미적 국가와 개인

쉴러의 “아름다운 나라”는 각 개성들의 조화된 국가이다. 이 국가는 획일화된 전체주의 국가일 수 없다. 전체주의 국가는 개인의 개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통합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나라는 감각적 선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감각적인 선의 통합은 ‘오직 한 명의 행복한 사람“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타인의 생각을 배제한다. 오직 한 사람만이 독점하는 사회이다.

 

 

아름다운 나라는 그 반대다. 아름다운 나라는 어떤 특권도, 어떤 독단적인 지배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나라는 각자의 개성을 만끽하면서도 유기적인 조화를 달성하는 사회이다. 쉴러의 다음 말에서 그 아름다운 나라를 상상해볼 수 있다. “아름다운 나라에서는 모든 것, 심지어 도구조차도 가장 고귀한 것을 가진 평등한 권리의 자유로운 시민이며, 참을성 많은 대중을 여러 가지 목표 아래 강제로 굴종시키는 지성은 그 동의를 요구한다. 여기에 아름다운 가상의 나라가 있으며, 이 나라에서 몽상가들이 실현을 바라던 평등의 이상이 실현된다.” [27번째 편지] 물론 쉴러는 이런 나라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쉴러의 의도를 놓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쉴러에게 아름다운 나라의 위상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처럼 현실을 판단하는 준거틀 구실을 하는 데 있다. 아름다운 나라는 가상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각자의 삶을 투영하고, 자기 삶에 대한 반성 공간을 부여하고, 진정한 삶의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또 이 나라는 감각적인 삶에 예속된 인간의 삶을 해방하고 자기 자신의 진정성에 토대를 찾게 해준다. 예술의 진정한 힘은 이런 가능성을 키우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잠재된 가능성으로, 인간의 부단한 노력으로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예술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무기력에 빠진 인간들에겐 자신의 삶 자체에 희망이 있으며, 야만에 휘둘리는 인간들에겐 자신을 되돌이켜 볼 기회를 제공한다.

 

쉴러의 미학이론은 낭만주의 예술의 기반을 형성했다고 평가된다. 자기 진정성에 토대를 둔 정치철학은 이전 예술에서 발견되지 않는 낭만주의만의 독특한 사상이다. 낭만주의 예술가들 또한 그리스 문화를 동경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의 무한한 힘을 새로운 국가건설의 동력으로 삼는 데는 인간능력에 대한 무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술에 내재된 무한한 능력의 발견은 역설적이게도 비참한 현실에서 얻어낸 것이다. 쉴러의 미학 사상도 비슷하다. 이른바 현실에 대한 변증법적 사고는 절망에 빠진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쉴러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그가 진단한 사회가 우리 사회와 유사하다면 더욱 그렇다.

 

이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