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을까?

“여러분,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을까요?”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생물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이런 질문을 던지신 적이 있다. 다들 망설이며 ‘심장’이나 ‘뇌’라는 대답을 꺼냈지만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심장을 떼어내면 그 심장을 하나의 생명으로 볼 수 있을까? 혹은 뇌는?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질문을 조금 바꾸어보자. 우리는 무엇을 ‘생명’이라고 부르는가? 자라나는 새싹과 점점 커지는 고드름은 둘 다 성장하지만 새싹만이 생명을 가진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히 움직이는 것은 생명을 가진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움직이는 로봇을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생명을 정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두산백과사전에서 ‘생명’을 찾아보면 가장 첫 줄에 이런 말이 등장한다. “어느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생명체들은 성장하고, 자극에 반응하며, 외부의 물질을 받아들여 화학적으로 변환시키고, 번식하거나 증식하여 개체를 늘린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명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지 잘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에게도 생명을 어떻게 규정할 것 인가는 오래된 고민거리였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비유로 흔히 알려진 물리학자 에드윈 슈뢰딩거 역시 같은 고민을 했고, 나름의 해답을 내어놓은 것이 그의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이다. 여기서는 생명을 물리학의 시선으로 바라본 슈뢰딩거의 견해를 잠시 빌려오도록 하자.

 

비록 생명을 정의하는 보편적인 잣대를 드는 것은 쉽지 않으나, 대부분의 정의에 빠지지 않고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부분 중 하나가 있다. 바로 생명이 있는 개체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며 그 개체의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음식으로부터 영양분과 에너지를 얻어서 삶을 보존한다. 추운 날에는 덜덜 떨어서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고 더운 날에는 땀을 흘려서 몸을 식힌다. 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의 몸은 일정한 상태이다. 다른 생물들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생물체는 물질의 출입과 변화,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에너지의 전환을 경험하면서 일정한 내부 환경을 유지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일정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다. 일정한 상태란 일종의 질서 있는 상태인데, 이 우주에서 그렇게 질서 있는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기란 참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한 번쯤 열역학 법칙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는 ‘에너지’와 ‘엔트로피’의 흐름을 규정하는 법칙으로, ‘질서’의 개념을 물리학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엔트로피의 변화가 된다. 열역학 법칙에 따르면 자연계의 질서 있는 것들은 항상 무질서하게 변해간다. 혹시 열역학 법칙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실수로 책상 위의 물이든 컵을 쏟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이때 온통 물이 흩어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흩어진 물이 자발적으로 다시 컵 안으로 돌아가 질서 있는 상태, 즉 컵에 가지런히 담겨있는 물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의 시간에 누군가가 몰래 방귀를 뀌면 방귀 분자들은 그곳에 질서 있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교실 곳곳으로 퍼져나가서 모두를 괴롭게 만든다. 이처럼 질서 있는 것들이 무질서하게 변하는 것은 당연한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생명은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바로 이 ‘무질서로의 변화’가 우주 전체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리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 외부의 질서 있는 에너지를 얻고 그것을 우리 체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사용한다. 음식으로부터 얻는 탄수화물과 지방과 같은 것들이 우리 몸에 화학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런데 열역학 법칙에 따르면 우리가 음식을 먹어서 체내의 질서를 유지할 때 그 행위는 반드시 ‘비효율적인 변환’을 동반한다. 음식에 있는 화학적인 에너지를 100퍼센트 전부 다 심장과 뇌가 기능하게 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는 등 질서를 유지하는 과정에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에너지 중 일부는 그 과정에 쓰이지 못하고 열이 되어서 우리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때 열이란 작은 원자나 분자들이 무질서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의 에너지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변해간다는 것은 무질서해지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이를 간단히 요약하여, 우리 생명체들은 ‘질서’를 섭취해서 ‘질서’와 ‘무질서’를 동시에 만들어 낸다고 평했다. 그 과정에 항상 비효율적인 변환이 동반되기 때문에, 생명체 자체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생명체 밖의 환경은 예전보다 무질서해진다. 따라서 우리 생물체들 각각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우주 전체를 살펴보면 우주는 더욱 무질서해지고 있다. 우주의 다른 어딘가에 더 많은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대가로 이런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생명이 있는 개체란, 끊임없이 그 자신을 무질서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발버둥 치면서 동시에 우주 전체의 무질서를 증가시키는 개체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생명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우리는 무엇을 생명이라고 부를까? 앞서 생명이란 그 자신을 질서 있게 하려고 발버둥치는 개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무질서로부터 벗어나려는 과정 안에 우리의 한시도 쉬지 않고 뛰는 심장과 잠들지 않는 뇌가 있는 것이고, 음식을 먹는 행위, 자극에 반응하는 행위 등이 있는 것이다. 몸 안의 어느 하나도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들도 결국 생명을 유지하고 질서를 추구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과정을 통틀어 생명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결국 생명이란 우리의 몸속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물체의 어느 부위를 딱 집어서 이곳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살아있기 위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그 모든 현상 자체가 바로 생명인 것이다.

 

김초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