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수의 몸

춤추는 몸, 그리고 아름다움

 

요즘 어린 무용수들을 보고 있으면 뭔가 나와는 다른 종류의 인류, 혹은 종種을 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 팔뚝 두께의 기다란 다리와 팔이 길게 뻗어난 골격, 꼿꼿하게 세워진 척추와 그 위에 셀카로 축소해놓은 듯한 작은 얼굴, 170cm (남자는 180~90cm)에 육박하는 늘씬한 키까지, 한국 무용수들의 체형—혹은 그들이 지향하는—이 어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흔히 영양상태가 좋아 한국인의 체형이 서구화되었다고들 하나, 지난 10년 사이에 대한민국 여성들의 평균키가 0.9cm 자란 것에 비하자면 무용수들의 평균 신장은 보다 급속도로 자라고 있다.

 

요즘 무용수들의 급속도의 성장은 슬프게도 무용수들이 우유를 좋아한다거나 키 큰 부모를 두었다거나 혹은 영양상태로 인한 전반적인 변화 같은 이유가 아니다. 무용수들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무용수들과 무용교사들이 어떤 몸을 원하는가 그리고 안무가나 무용수의 몸을 어떠한 방식으로 프레젠테이션 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안무자 로이드 뉴슨(Llyod Newson)은 “많은 무용작품들이 젊음과 아름다움, 날씬한 몸에 대한 것만 이야기한다. 마치 미인대회처럼”이라고 꼬집는다.

 

어린 무용수들을 가르치는 발레교사 친구에 따르면 무용인구가 늘어난 만큼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특히 다이어트나 체형에 대한 엄격한 요구는 어린 무용수도 피해갈 수가 없다고 한다. “성장기의 지나친 다이어트가 키와 영양에 치명적일텐데” 하는 윤리적 질문에 “알아서 커야해”라는 슬픈 대답이 돌아왔다.

 

춤의 장르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상당수의 콩쿨이나 입시, 무용단 혹은 단체 오디션에서 여전히 무용수의 체형은 중요한 이슈가 된다. “체격점수”가 버젓이 존재하는 콩쿨, 수상경력 옆에 키와 체중을 적기를 요구하는 교육기관들, 요구하는 키를 응시기준에 적거나 심지어 키와 몸무게를 현장에서 측정하는 오디션도 현실에 존재한다. 비록 무용수의 자기관리는 중요한 문제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신체적 요건들은 무수한데, 이를 평가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무용수의 몸은 재능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하는 걸까.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어린 시절부터 무수한 무용수들을 만났지만 나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 100% 만족하는 무용수를 만난 적이 없다. “팔이 짧아서, 머리가 커서, 새가슴(흉골이 선천적으로 돌출된 상태)이라서, 다리가 짧아서, 다리는 긴데 허리가 짧아서, 발목이 두꺼워서, 발가락이 길어서, 키가 작아서, 혹은 키가 너무 커서” 그들은 자신의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요정이나 님프 같은 비현실적 캐릭터를 소화하기에 적당한 – 혹은 이미 현실세계에서 그런 이미지를 연출중인 – 아름다운 신체의 소유자도 자기신체에서 흠결을 찾는다. “저는 무용수로 적합한 몸이 아니예요”라던 이십년 이상 국내최정상의 발레리나로 사랑받으며 – 또한 무수한 화보와 미디어에서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로 – 살아온 한 무용수의 고백은 충격적이다.

 

물론, 예술가처럼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자기자신에 대해서 만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또 만족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무용수들은 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이토록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것일까. 춤추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라는데, 춤의 핵심인 춤추는 몸은 이렇게 자유롭지 않고 상상속 이상화된 기준들에 의해 재단 받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아름다워야만 구원받는가

사실 춤의 신체성이라는 특징은 춤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데 있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약점에 가까웠다. 20세기에 와서야 몸은 비합리적 열정이나 감정의 통로라 여겨지던 것에서 창조적 자기표현이 일어나는 장소로 바뀌었다. 현대사회에서는 푸코의 말처럼 몸의 형태, 이미지가 개인의 존재를 대변하게 되고 몸은 권력행사의 주체가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몸의 기능이나 외형에 의해 구분되고 차별 받는다.”는 명제는 예술형태의 춤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특히 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클래식 발레의 경우나 군무의 역할이 중요한 무용단체들을 보면, 신체의 비율이나 유연성, 해부학적 골격이 무용수나 학생을 뽑는 절대적 가치가 된다. 특히 기하학적 대형으로 길게 늘어진 춤의 패턴을 보면, 춤이 제시하는 인간의 몸이 자유롭거나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이상화되고 복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몸의 개별성, 개인이 구별되는 몸 대신 이상화된 몸, 유사한 몸의 이미지는 실제로 발레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발레 중 하나인 1832년 작 <라 실피드(La Sylphide)>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인 제임스 루벤은 자기 결혼식날 장난기 넘치는 매력녀인 공기의 요정(실피드)에게 반해 숲속으로 쫒아간다. 실피드는 제임스를 피해 몸을 숨기는데—이는 맥락상 공포의 도주가 아니라, ‘오빠, 나 잡아봐요’ 의 전형적 밀당 패턴에 가깝다—작은 날개로 바위 뒤나 나무 위로 숨는 대신, “자신과 똑같이 생긴 십 수명의 실프들” 사이로 숨어버리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대표적인 발레인 <백조의 호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진한 멜로드라마의 진정한 비극은 악마 로스바르트가 어여쁜 공주님을 반인반수로 만들었다는 설정이 아니라, 사랑을 맹세한 늠름한 왕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못 알아보고 전혀 정반대의 모습(의상, 자태, 태도 등)과 매력을 지닌 흑조에게 청혼하는 장면이다. 통상적으로 백조역의 무용수가 3막의 흑조 역할까지 연기함으로써 한 무용수의 정반대의 매력을 보는 기회로 여겨지나, 맥락상으로는 같은 사람이 연기함으로써 왕자의 수상한 혼란에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사실, 이를 악과 선을 오가는 주인공의 양면성과 자기파괴적인 Anti-self 로 해석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더욱 흥미롭기는 하지만 말이다.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백조들은 왕궁의 아가씨들보다 훨씬 더 획일적인 몸과 몸의 사용방식을 보여준다. 하얀 튜튜와 창백한 살빛,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표현, 자로 잰 듯 펼쳐진 대형과 장시간의 포즈, 오차 없이 실행되는 동일한 움직임과 라인은 그들이 사람이 아닌 비인간적 캐릭터임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4마리의 백조들이 춤추는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 기분전환이라는 뜻에서 온 단어로 극의 내용과 상관없는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춤)에서 4명의 무용수들은 아예 손을 교차로 잡고, 다리와 목의 정확하고 동시적인 움직임만으로 박수를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규칙성은 야생의 백조들에게는 발견되기 어려운 특징이긴 하지만 말이다.

 

제롬 벨(Jerome Bel) 안무의 <베로니카 두아노(Veronique Doisneau)>라는 작품에서 은퇴를 일주일 앞둔 42살의 발레리나는 무대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엄격한 발레단의 계급에서 군무의 리더역할을 맡는 베로니카는, 춤추기 가장 끔찍한 장면으로 바로 이 인기 있는 <백조의 호수> 호숫가 장면을 꼽는다. 사랑에 빠진 주역 무용수가 낭만적인 듀엣을 하는 꽤 긴 시간 동안 32명의 무용수들은 똑같은 포즈를 숨소리조차 죽이며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스타들을 빛내기 위한 인간 장식물이 됩니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서른 두 명의, 포즈와 표정과 호흡과 각도와 몸은 놀라울 만큼 동일하게 전시된다. 이는 무용수 개인에게도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된다. 방금 끝낸 동작에서 몰아쉰 숨의 모자람, 코르셋처럼 조이는 의상, 따가울 정도의 조명에 녹아내리는 땀, 가쁜 호흡을 내색 할 수 없는 온몸의 긴장상태, 옆 사람에 맞추어 눈동자까지 고정해야하는 포즈까지. “가끔 나는 소리를 지르거나, 무대를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을 하지요”라는 경험 많은 무용수의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닐 것이다.

 

호주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 중인 로이드 뉴슨은 1996년 DV8 Physical Theatre 라는 무용단체를 시작한 이래 에이즈, 살인, 동성애혐오, 장애, 노인, 무슬림등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을 춤으로 다루어왔다. 심리학을 전공 한 심리치료사 출신으로 아름답고 멋진 몸의 전시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상태에 관심을 쏟는다. “내겐 완벽한 아라베스크보다 자신의 삶을 표현해내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느껴진다. 무엇인가를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의미와 상황이다”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2003년 발표한 <The Cost of living >에는 아예 다리가 없는 데이비드 툴 (David Toole)이라는 무용수가 등장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압도적인 연기와 춤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보여주며, 사회적으로 “장애”라 불리는 다리의 부재를, 자신의 개인적 신체특성으로 전환시킨다. 그의 춤은 이상화된 몸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무용수 일반에게 “무용수에게 몸이란 무엇인가”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오늘 날의 춤이 드러내는 인간신체의 아름다움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생성하고 재발견되는 것에 더 가깝다. 이처럼 춤은 몸에 대한 사회적 관심, 관습, 금기, 제한 등을 반영하며, 또 때로는 그에 도전해왔다. 춤추는 몸이 자유로우려면 이는 막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에 도전하고, 과거를 반성하고, 스스로의 고유성을 찾는 과정을 통해 아름다움의 자율성을 회복해야한다. 다른 모든 “자유”의 개념처럼 말이다.

 

제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