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말고 ‘게임’ 하기

비디오게임 한글화의 역사와 논란, 전망 살펴보기

 

‘백색마약(白色痲藥)’이라는 말을 아는가? 서브컬처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PC통신 서비스였던 하이텔에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인기를 끈 용어 ‘백색마약’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연애 어드벤처 게임 <화이트 앨범>(1998)의 별칭이다.

 

그런데 15년쯤 된 이 말이 웹상에서 다시 오르내리고 있다. 2015년 8월 16일 <화이트 앨범> 리메이크(2010년 플레이스테이션3 전용 리메이크판의 PC 이식판)의 아마추어 동인(同人) 비공식 한글화패치가 배포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번 <화이트 앨범> 리메이크의 비공식 한글화패치 공개 행보는 패치 제작진이 정품 구매를 적극 권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비공식 한글화패치는 주로 정품 구매와는 무관하게 진행됐고, 국내 정식 유통에 어려움이 있는 장르 특성상 연애 어드벤처 게임의 정품 구매를 권장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화이트 앨범> 리메이크 비공식 한글화 패치 제작자(닉네임 프기니)는 자신의 블로그에 “본 패치는 정품에서만 구동됩니다”라며 온라인 게임 유통 사이트인 DMM.com을 통해 정품 구매 방법을 패치파일과 함께 게시했다.

 

1990년 최초로 한글화된 비디오게임 <알렉스 키드 인 미라클 월드>
1990년 최초로 한글화된 비디오게임 <알렉스 키드 인 미라클 월드>

 

 

 

한글화된 게임을 한다는 것

‘한글화’는 해외의 게임을 한국어로 변환하는 언어 현지화(language localizing) 작업을 이른다. 1990년 삼성전자에서 삼성겜보이2용으로 공식 배급•출시한 액션 게임 <알렉스 키드 인 미라클 월드>(1986)가 최초의 한글화였다. 1993년에는 일본 정식 라이선스를 받은 최초의 한글화 PC 게임으로 <프린세스 메이커>가 한도흥산무역(만트라)를 통해 발매됐고, 이듬해 <삼국지 Ⅱ>와 <은하영웅전설 3>, <탄생~Debut~>가 한글화·유통되어 인기를 끌었다.

 

한편 유저들도 한글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최초의 아마추어 비공식 한글화 중 하나로 1996년의 <동급생> 한글화가 꼽힌다. <동급생>은 당시 인기를 끌던 에로게(エロゲー, 성인용 게임을 뜻하는 Erotic Game의 일본식 조어) 장르다. 이 시기 <동급생>의 아마추어 동인 한글화팀 ‘한누리’ 등 많은 아마추어 한글화팀이 결성되어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 <유작>, <시즈쿠>를 비롯한 많은 게임의 한글화가 이루어졌다. 비공식 한글화 정착 초기, 주로 텍스트가 많은 장르 특성상 번역 수요가 큰 에로게 위주로 비공식 한글화가 이뤄졌다. 이러한 흐름은 아마추어 한글화되는 게임의 폭이 넓어지고 한글화팀의 방향성이 다변화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팀 한누리의 <동급생> 비공식 한글화패치 인스톨 화면
팀 한누리의 <동급생> 비공식 한글화패치 인스톨 화면

 

2000년대 초에는 미국 게임 제작사 블리자드(Blizzard)를 필두로 다시 한글화 붐이 일었다. 처음 본격적으로 한글화된 블리자드 사의 게임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다. 문화적 차이로 의역과 로컬라이징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서구 게임 특성상 한글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고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2010년 ‘자유의 날개’를 시작으로 2015년 8월 18일에 확장팩 ‘공허의 유산’의 베타테스트를 실시한 <스타크래프트 2> 대부분의 고유명사를 한글화했으며 게임 중간에 등장하는 시네마틱 영상의 입 모양을 한국어 대사에 맞추기까지 했다.

 

예외적인 사례도 있지만 한글화는 한국 패키지게임 유통 산업에 영향을 줬고,외산 패키지게임에 대한 접근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하며 몇몇 외산 게임의 유저 인지도에 적잖은 영향을 줬다.

 

 

도마 위 한글화

그러나 한글화가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한글화는 단순 번역이 아니라 문화와 언어의 특성을 고려한 현지화로 소비자의 구미를 맞추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순전히 한글화 담당 측의 몫이다. 문제는 소비자가 이 게임의 한글화가 적절치 않고 느끼는 경우, 한글화가 게임 흥행 실패의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아마추어 한글화 역시 언어 현지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과도한 직역과 오역도 문제다. “Hello there! Mighty fine morning, if you ask me! I’m Waldo.”라는 대사를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왈도”라고 번역한, 일명 ‘왈도체’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마이트 앤 매직 6>이 극단적인 예다.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때때로 아마추어 비공식 한글화 작업은 비법(非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작업의 법적 모호함 때문이다. 패치 처리한 게임 원본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지만, 아마추어 비공식 한글화 과정에서 게임 원본 소스가 수정•유출되는 경우 문제가 된다. 때문에 게임 제작사와 유통사 측에서 한글화를 막기도 하는데, 한글화를 Mod(Game Modification, 오리지널 게임을 사용자가 커스터마이징해 만든 2차 창작 컨텐츠)로 간주하느냐 간주하지 않느냐가 쟁점이다. 단 비공식 한글화를 합법적인 Mod로 보더라도 한글화가 게임 원 텍스트의 번역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허가받지 않은 2차 창작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또한 한글화되는 게임이 불법인 경우도 있다. “게임 패치의 배포는 게임을 통째로 배포하는 것이 아니고, 게임물관리위원회의 ‘불법게임물신고포상금제도’는 특정 게임의 한글화패치를 신고 대상에서 제외하므로 “등급 및 게임물내용정보 등의 표시사항을 표시하지 아니한 게임물의 유통”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에로게의 경우 대부분 미인증 콘텐츠이며, 아동 혹은 청소년으로 인식될 여지가 있는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일명 ‘아청법’)에 저촉된다. 때문에 <화이트 앨범> 리메이크 한글화패치 측의 대응이 흥미로운 것이다. 2002년에 동인 한글화팀을 통해 비공식 한글화된 1998년작 <화이트 앨범>은 공략 대상 캐릭터 중 고등학생이 등장하는 성인용 연애 어드벤처 에로게로 ‘아청법’에 저촉되지만, 이번에 패치가 배포된 <화이트 앨범> 리메이크는 전연령가이기 때문에 정품 다운로드를 권장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불법복제 문제가 한글화의 최대 난점이다. 적잖은 시간과 비용이 언어 현지화와 파일 수정을 비롯한 한글화 작업에 소요된다. 따라서 많은 게임, 특히 시리즈물 패키지게임은 판매량에 따라 한글화 여부가 결정되는 실정이다. 한글화 Mod 간주 문제와 관련해 아마추어 한글화가 불법복제를 조장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불법복제가 힘든 일부 콘솔 게임이나 불법복제와 무관한 온라인 게임은 패키지게임에 비해 자주 한글화되는 편이다. 한글화 덕분에 패키지의 판매량이 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판매량을 보장할 수 없을 때 한글화를 동반한 국내 정식 발매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례로 <삼국지 시리즈>는 시리즈 2탄부터 11판까지 모두 한글화되어 국내에 발매됐지만, <삼국지 11 PK>과 <삼국지 12•12 PK>는 발매되지 않았다. 게임의 한글화 여부가 불법복제율이 높은 한국 패키지게임 시장의 실태를 반영하는 지표로 작용하는 셈이다.

 

<화이트 앨범> 리메이크의 한글화 적용 화면
<화이트 앨범> 리메이크의 한글화 적용 화면

 

 

한글화: 지금 그리고 앞으로

그러나 이런 여러 난항에도,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글화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한글화에 대한 유저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문명하셨습니다”, “순순히 금을 넘기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등의 유행어로 2010년 화제가 된 <시드 마이어의 문명 5>(이하 <문명 5>) 열풍을 기억하는가? 팬들이 제작해 배포한 한글화패치 또한 <문명 5>의 인기에 한몫을 했다. 세계의 고유 지명·인명 등이 다양하게 등장해 언어가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한글화로 인해 접근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문명 5>는 아직 국내에 정식 출시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임의 유명세로 급증한 유저의 적지 않은 수가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문명 5>를 플레이했다.

 

그런데 한국의 패키지게임 시장에서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인기에 힘입어 이듬해 2011년 1월 11일 한글판 매뉴얼을 포함한 <문명 5> 패키지 한국 정식 발매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같은 해 3월 29일부터는 공식 한글패치를 공개해, 정품 이용자라면 게임 유통 플랫폼 스팀(Steam)을 통해 무료로 패치를 이용할 수 있다. 이후 8월에는 게임 내에서 한국 문명이 DLC(Downloadable contents, 다운을 통해 게임 안에서 컨텐츠를 확장 가능케 하는 패치) 형태로 추가되었다. <문명> 시리즈 유저 커뮤니티 카페인 ‘문명메트로폴리스’는 공식 한글패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자체 패치를 개발하고, 불법 복제물 이용과 유포를 금지하며 정품 구매를 지속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아마추어 한글화패치가 추후 게임 제작사 및 유통사에게 정식 한글화로 공인되거나 게임 제작사 및 유통사에서 동인 한글화팀에 한글화를 위탁하는 경우도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더 위처 2: 왕들의 암살자>의 경우 터키 유저들의 터키판 패치가 제작사인 CDPR로부터 공식으로 인정받자 해당 게임의 한글화패치를 제작하던 한국 유저들이 제작사 측과 협상을 시도해 공식 한글화 패치로 작업을 인정받았다. 또한 한글화 팀 ‘이름미상’이 게임 제작사 측에 한글화를 위탁받아 진행한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의 경우, 한글화의 질이 낮다고 평가되는 2편•4편의 경우와 달리 잘 된 한글화로 유저들의 호평을 받았다.

 

비디오게임 40여 년의 역사 중 한글화의 역사는 25년 정도로 길지 않다. 그러나 한글화가 한국의 게임 유저들과 한국의 패키지게임 시장에 남긴 발자취가 작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한글화를 바라보는 여러가지 견해가 존재하지만, 친숙한 언어로 낯선 나라의 게임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비디오게임 한글화가 선사하는 의의다. 그 의의를 지키고자 하는 한, 한글화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보와 존립을 계속해서 이끌어내야 하고 또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Game’ 대신 ‘게임’을 하고 있다.

 

안신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