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에 대한 두 개의 글

1.

유인촌 전 문화부 장관이 퇴임 후 두 번째 연극을 통해 연극배우로 돌아왔다. 1951년 3월 20일 생인 유인촌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1974년 MBC의 공채 탤런트 6기로 연기 생활을 시작하였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언론홍보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2000년도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를 걸쳐 환경부 환경홍보사절과 산림청 산림홍보대사 등을 역임하며 2007년도에는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선거후보 문화예술정책 위원장 직무대행에 선임되자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된 그는 최장기간 동안 문화부장관에 재임되었고,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대통령 실 문화특별보좌관으로 일했다. 또, 2012년도에는 예술의전당 이사장에 임명되어 7개월 간 이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2013년 4월 그가 설립하였던 유시어터에서 <파우스트, 괴테와 구노의 만남> 이후, 두 번째 연극 <홀스또메르>를 들고 나왔다. 2014년 2월 28일부터 3월 30일까지 CGV 신한카드아트홀에서 선보이는 이 연극은,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어느 말 이야기>를 각색하여 선보인다. 이 <홀스또메르>는 온전히 유인촌의 이야기이다. 원작은 늙은 말 홀스또메르의 눈으로 보는 인간사 이야기지만, 이 연극은 인간사를 다루는 데에 성공하기 보다는 철저히 유인촌이란 사람 자체에 집중했다.

 

늙은 말 홀스또메르는 말 중에서 가장 우수한 혈통을 타고 태어났지만, 몸의 얼룩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번식할 수 없도록 거세당한다. 이후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인정받아 경주마로서 전성기를 보내게 되지만,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던 사람의 욕심 때문에 가혹하게 사고를 당하면서 경주마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도살당한다.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이다. 연극에서 유인촌은 완벽하게 홀스또메르로 빙의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야기 자체가 적어도 유인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정계생활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극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다. 하지만 연극은 홀스또메르라는 배역을 배우 유인촌과 동일시함으로써 역겨워 진다. 유인촌의 연극 <홀스또메르>는 결과적으로 ‘이용’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성기에 이용당하고 불구가 된 후 이용가치가 떨어지며 숙청되는 이야기. 그러면서 욕망과 욕심에 대한 인간사는 부가적으로 들어온다. 각종 인터뷰에서 유인촌은 원작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연극을 기획하고 진행했다고 말했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이에 실패했다. 원작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했다면, 욕망과 욕심에 대한 인간사를 보다 부각시켜야 했다. 이 연극의 실패 원인은 관객들이 무대에 서 있는 배우가 유인촌임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늙은 말 홀스또메르의 시선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관객은 말의 시선이 아닌 유인촌이 연기하는 홀스또메르라는 말만 보게 된다.

 

이것은 유인촌이란 배우가 가진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다. 유인촌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홀스또메르에 완벽하게 빙의하여 연기를 펼친다. 문제는 유인촌이라는 사람 자체에 존재한다. 그의 행적과 홀스또메르가 겹쳐지면서, 말의 탈을 쓴 채 동정을 구하고 공감해주기 바라는 그의 대사와 몸짓은 관객들을 불쾌하게 한다. 말의 눈으로 인간사를 보는 우화와 풍자가 아닌, 늙은 말 홀스또메르가 겪는 고난한 일대기, 혹은 유인촌이 원하는 정치적으로 소비되고 말아버린 자신의 이미지만이 눈에 들어온다. 이 연극의 서사가 유인촌의 일대기와 겹치는 부분이 있기는 하나, 유인촌과 홀스또메르는 전혀 다른 선상에 있다. 유인촌은 이 연극에서 스스로를 홀스또메르와 동일시한다. 말을 이용한 사람들 때문에 추락한 홀스또메르처럼 자신도 누군가로부터 이용당했기에 추락했다고 반복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인촌의 추락은 사실 홀스또메르의 추락에 비하면 추락도 아니다.)

 

그에겐 ‘선택’이 있었다. 소모품으로만 사용되었던, ‘선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거세마 홀스또메르와는 다른 길을 걸었고 그 길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는 잘 맞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정말 스스로를 홀스또메르라고 여긴다면 이 연극은 일종의 자위일 뿐이다. 온전히 <홀스또메르>가 전달하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면, 그는 무대로 돌아오지 않는 편이 나을 뻔 했다. 그래도 그는 공연 중 사진을 찍는 관객들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김주스)

 
2.

그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역사스페셜>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고, 유인촌이라는 진행자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약간은 조악한 3D 세트장을 걸어다니며, 명료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나는 그를 좋아했다. 텔레비전을 그다지 많이 보던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토요일 밤 여덟시에 진행되던 그 프로그램을 꼬박꼬박 챙겨 보고는 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를 <전원일기>의 등장인물로 기억하는 듯한데, 나는 그가 본디 배우였다는 사실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가 진행하던 <역사스페셜>이 폐지된 이후, 그를 브라운관에서 볼 기회가 그렇게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다시 등장한 건 2007년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였다. 그는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유세 현장에도 자주 모습을 비췄다. 나는 그때 어머니한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저 사람 저러다 나중에 문화부 장관 같은 거 한번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었는데, 그는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직후 정말로 그 정부의 첫 문화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 그때 나는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시기와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온전하게 겹친다. 사실 그때만 해도, 고등학생 신분이던 내게 가장 직접적 영향을 끼친 정부 부서는, 당연하게도, 교육과학기술부였다. 이명박 정부는 (역설적이게도) <교육방송>(EBS) 강화를 외쳤고, 나는 <수능특강>이라는 이비에스 교재를 사서 열심히 풀었다. ‘만점자 1%’ 같은 정책이 나온 것도 그 시기였다. 그가 장관을 맡고 있던 문화체육관광부는 나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내가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문화부 산하의 대학에 입학하게 되리라는 사실도 몰랐다.

 

나에게 장관 유인촌이 보이기 시작한 때는 아마 “찍지 마, 씨발!” 사건이 터졌을 때인 것 같다. 굳이 그분의 과거를 캐내자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동영상(http://youtu.be/KOqatqP8Lds)을 찾아보니, 그는 분명 행정부 장관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기질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방송계에서 꾸준히 활동했으면 좋은 노배우의 이미지로 남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정치는 사람을 망친다는 사실을 지난 정부에서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한예종 사태’의 광풍이 이미 학교를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그 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장관직에 오른 유인촌은 ‘표적 감사’를 통해 협동과정을 축소했고 몇몇 교수는 잘라버렸으며 당시 학교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유비쿼터스-아트&테크놀로지(U-AT) 통섭교육 사업을 엎어버렸다. 그 일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은 ‘사태’ 이후 학교의 분위기가 크게 위축되었다고 말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사태’는 어느 정도 정리됐고, 협동과정이라는 체제도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다 지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에게 어떤 책임을 묻기도 쉽지는 않다. 그가 꼭 나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그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기도 하다. 아직도 그때의 미련이나 야망을 버리지 못한 몇몇 교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제대로 추진해 보지도 못하고 엎어진 사업의 원대한 청사진을 지금 와서 들춰볼 때도 그렇다. 유인촌은, 어떤 잘못된 행정가 한 명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과 한 사회의 정신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곱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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