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역사(들)>과 고다르의 서재 (3)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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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역사(들)>은 20세기의 예술로 일컬어지는 영화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그 영광을 노래하기보다는 오욕, 타락 그리고 실패의 역사를 말한다. 무엇보다 영화는 정작 예술이 되는 데 실패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fatale beauté)”이라는 부제가 붙은, <영화의 역사(들)>의 2B파트에서 고다르는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는 상품이 되었으니 우린 그걸 태워버려야 한다고, 나는 앙리 랑글루아에게 말했었다.”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뒤이어 고다르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하라. 내면의 불(le feu intérieur)을 통해 [태워야 한다]. 예술이란 불과 같아서 그것이 태워버린 것으로부터 탄생한다.” 그가 이렇게 읊조리는 동안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서재에서 이런저런 책을 꺼내 보는 고다르의 모습, <주말>(1967)의 불타는 자동차들, 그리고 화면 위에 떠오르는 “막이 오르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꿈을 버린다.”라는 텍스트이다. (사진 1 참조) (불)가능한 희망을 위해 모든 것을 부정하기, 탄생을 위한 적멸(寂滅), 역설적이기 짝이 없는 (반)행위를 문명이 부과한 의무를 철저히 수행하지 못한 예술에 허락된 유일한 몸짓으로 취하는 것, 시대착오적으로까지 여겨지는 이러한 예술적 영웅주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헤르만 브로흐, 토마스 만, 로베르트 무질 등의 독일어권 작가들 —모두 <영화의 역사(들)>에서 직접적으로 언급 내지는 인용되고 있는 작가들이다—이 고다르와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읽도록 권유한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오스트리아 작가 헤르만 브로흐의 모더니즘 소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고다르가 안느-마리 미에빌과 함께 만든 50분 분량의 비디오 에세이 <소프트 앤 하드(Soft and Hard)>(1985)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이후 <영화의 역사(들)>에 이르러서는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모티브 대부분을 제공하는 핵심적인 텍스트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트로이 전쟁 이후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 아이네아스가 (로마인들이 로마의 전신이라고 간주했던 도시인) 라비니움을 세우기까지의 모험을 기술한 미완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 베르길리우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브로흐가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베르길리우스 생애의 마지막 이틀이다. 그리스로부터의 오랜 배 여행 끝에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브룬디시움에 도착한 그는, 미완의 아이네이스가 진정한 인식에 닿지 못한 채 아름다움이라는 가상의 주위만을 겉돌았을 뿐이라는 판단 아래, 자신이 죽기 전 모든 원고를 태워버리고자 한다. 이때 열병의 환각에 사로잡힌 그가 침상에 누운 채 펼치는 치열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한 내성(內省)의 과정—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본지 제245호에 실린 연재글 참조)의 주인공 루바쇼프의 그것을 능가하는—을 거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적 만연체로 서술한 2부는 이 소설의 백미다. ‘물-도착’, ‘불-하강’, ‘흙-기대’, ‘공기-귀향’의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소설에서, <소프트 앤 하드>와 <영화의 역사(들)>의 고다르가 거듭 인용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2부에서 발췌한 텍스트들이다.

 

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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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역사(들)> 2B파트의 중반부에서, 고다르는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에서 발췌한 장문의 텍스트를 여배우 사빈느 아제마가 흡사 화면 밖의 누군가를 향해 발화하듯 담담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낭독하는 모습을 거의 6분 가까이 보여준다. (사진 2 참조) 발췌한 텍스트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브로흐의 원작 이곳저곳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원래의 순서와 달리 배열, 혹은 몽타주함으로써 슬며시 의미를 굴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참조) 재구성된 브로흐의 텍스트는 20세기의 영화가 엄연한 죽음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 영화란 기원이 되는 대상을 상징적으로 ‘죽이고’ 대체하는 사진적 이미지에 기초해 탄생했으며, 또한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에 적시에 응답하지 못했기에 이후의 영화는 ‘뒤늦음’(belatedness)의 감각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고다르적 서사—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빚어진 이미지의 타락,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라는 2B파트의 주제를, 대단히 농밀한 시적 언어를 통해 함축적으로 제시해 준다. “가까이에 숨은 아득함, 먼 곳을 넘는 아득함, 양자의 바깥과 안의 한계에 가로놓인 경계, 양자의 현실 속에 있는 비현실, 양자 속에 환기된 유혹—그것은 아름다움이었다. […] 아름다움은 마령(魔靈) 같은 힘으로 모든 것을 수렴한다. […] 아름다움이란 바로 유희 그 자체 […] 아름다움에의 도피, 도피의 유희.”

 

고다르의 작업과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사이의 공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의 역사(들)> 전편을 가로지르는 몽상, 환상, 사색에 빠져드는 수인(囚人)의 모티브는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며 병상에 누워 있는 그는 로마의 영광을 위해 아이네이스의 완성을 탐하는 아우구스투스황제에 의해 상징적으로 속박된 존재이다)는 물론이고 브로흐 자신(이 소설의 일부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체포되어 수감되어 있는 동안 집필되었다)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한 강대한 문명(로마제국)이 탄생하는 시기를 배경으로 정작 문명의 한계와 종언에의 예감을 펼쳐낸 이 소설이, 의미심장하게도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에 간행되었다는 점도 고다르는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우리디케를 되찾으려 저승으로 ‘하강’한 오르페우스의 여정을 나락에 떨어진 예술의 구원의 우화로 다시 취하는 <영화의 역사(들)>의 서사적 흐름은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에서 거의 직접적으로 차용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정도다. (“에우리디케를 찾아서 저승으로 내려가려 했을 때 오르페우스가 구하고 있던 것이 다름 아닌 이 [아름다운 언어의 싸늘한 표층 밑에 있는] 언어가 아니었던가?”) 아이네이스』 제6권에 등장하는 경고의 말(“지옥의 문은 밤낮으로 열려 있으니 내려가는 일은 쉽다오. 하지만 발걸음을 돌려 위쪽 세상의 대기로 돌아오는 일, 이것이 문제고 이것이 힘든 일이라오.”)에 예술의 구원과 결부된 의미를 더한 것은 바로 브로흐이며, 고다르가 “이것이 문제고 이것이 힘든 일이라오.(hoc opus hic labor est)”라는 인용구를 <영화의 역사(들)>의 첫머리에 두기로 결정했을 때, 그 또한 분명 ‘오푸스(opus)’라는 라틴어가 ‘과업’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중의 뜻으로 읽힐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고다르가 직접 인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미지에 대한 브로흐-베르길리우스의 다음과 같은 판단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큰 지침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활이란 이미지의 축복과 이미지의 저주 아래 영위되는 것이다. 다만 이미지에 의해서만, 인생은 스스로를 파악할 수가 있다. 이미지를 추방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집단생활이 시작된 이후 인간 속에 숨어들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에 선행하며 그보다 강력하다. 그것은 무시간적이며 과거와 미래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이중의 꿈-기억이며 우리 자신보다도 강대하다.”

 

유운성

 

※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의 한국어판은 김주연, 신혜양 교수의 번역으로 2012년 시공사에서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영화의 역사(들)> 2B파트에서 사빈느 아제마가 낭독하는 부분을 아래 정리해 보았다. 그녀가 낭독하는 순서대로 정리했으며 숫자는 한국어판 1권의 쪽수와 행을 뜻한다. (발췌는 모두 1권에 집중되어 있으며 2권에서는 발췌된 부분이 없다.) 295:18~296:2 / 167:8~167:24 / 168:22~169:4 / 298:17~299:5 / 173:17~173:22 / 174:4~174:9 / 91:7~91:12 총 일곱 군데에서 발췌되었으며 마지막 부분만이 1부에서 발췌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2부에서 발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을 인용할 때는 가급적 한국어판 번역을 따랐으나 일부 수정하거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