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적 (2) 애석하지만 게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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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의 일이다. 평론가 A는 한 미술잡지로부터 작가 B에 대한 작가론을 청탁 받았다. 원고청탁을 수락한 A는 자신이 B에 대해 갖고 있던 입장을 글로 옮겼고, 잡지에 보냈다. 하지만 그 글이 지면에 실리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 글의 내용을 미리 알게 되었는지 B가 그 내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잡지사에 항의를 했고, 잡지사가 항의를 받아들여 게재를 취소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이 사례에서 잘못한 이는 누구인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잡지사에 항의한 B인가? 아니면 작가가 항의했다고 A의 원고를 지면에서 빼버린 미술잡지 편집장인가? 물론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이라면 대부분 B와 편집장의 잘못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건의 당사자 B는 상당히 개념적인, 그리고 논쟁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문제의 그 미술잡지도 스스로 ‘진보적’인 입장에 서겠다고 공공연하게 표명하던 잡지였다. 세상에나 논쟁적인 작업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논평들을 차단한다? 그걸 받아주는 잡지는 과연 ‘진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일까?(유명작가와의 ‘한 발 더 진보된’ 친밀도를 이야기하는 걸까?)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이 사례를 접했을 때 이들에게 매우 실망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이 스스로 규정한 ‘정체성’은 한낱 가면에 불과했던 것인가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례는 어디까지나 A의 입장과 ‘뒷담화’로 떠도는 이야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실제로 B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도대체 왜 해당 잡지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누구인지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과연 A에게만 한 차례 운 없이 일어났었던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올 초에 만난 한 미술잡지 기자는 미술잡지에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저곳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되는 직업상의 고충(?)을 토로했다. 기사 하나 준비하는 과정에도 어디서 그 소식을 들었는지, “너 요새 뭐 한다며?”라고 넌지시 물어오는 전화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의 미술잡지 편집장도 B에게서 그런 전화를 받고 혼자 심란해진 거였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A가 쓴 원고의 내용이 미리 알려지려면, 편집장이나 담당기자가 B에게 원고를 미리 보여주지 않고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실제로 생존작가와의 인터뷰나 작가론을 쓰는 과정에서 해당 작가에게 원고를 ‘검사’ 받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적잖게 있다. 필자도 학교를 다니면서 작가 한 명을 선정하고 그 작가에 대한 작가론을 쓰는 과제를 받아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작가와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고, 작가에게서 ‘글이 완성되면 한 번 보여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저 수업 과제물로 제출하는 작가론인데도 자신의 작업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만약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매체에 실리는 글이라면 이런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더 쉽게 겪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호기심이 하나의 검열과정처럼 작동할 때, A와 같은 문제가 터지는 것이다.

 

미술잡지에서 작가나 작업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들을 별로 보기 어려운 이유도 이러한 검열 매커니즘 때문일 것이다. 검열 매커니즘이 작동되는 과정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가령 긍정적인 이야기만 담기에도 지면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던가, 아니면 상대주의라는 말에 너무 꽂힌 나머지 분명한 입장을 이야기 하는 것이 ‘편향적’으로 느껴졌다거나, 아니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붙잡기 위해 안전한 길들을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미술계 내부에 이런 검열 매커니즘이 존재하고, ‘논쟁’이라고 부를만한 입장의 충돌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검열 메커니즘 아래에서 비평은 몸을 사린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실천을 이야기하는 치기어린 선언은 자취를 감추었다. 실천의 결과물인 작업들을 통해서 각각의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도 더 이상 보기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홍성담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치자. 그의 작업을 강제로 전시장에서 끌어낸 광주시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있을지언정, 그의 작업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매체에서 읽어볼 수는 있을까? 그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오늘날의 현실에 작가들이 어떻게 조응하는지,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작가와 비평가들이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마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물론 매체라는 공론장으로 옮겨오지 않을 뿐, 이야기는 되긴 할 거다. 어두컴컴한 술집, 카페, 매캐한 담배연기가 피어오르는 흡연장에서 스치듯 이야기 되는 선에서 맴돌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어느 선생이 누구 허벅지를 더듬더라’, ‘누가 누구랑 사귀었다더라’와 같은 이야기들과 함께 망각의 저편으로 흘러갈 것이지만 말이다. 그 자리에서 아무리 의미 있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들, 쌓이지 않으니 우리의 미술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다. 매체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우리는 잘하고 있다’ 같은 자기최면만 계속해서 되풀이 될 것이고, 가끔 대상 없이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 늘어놓는 정도로 비판성을 가진 양 착각하는 글들이 나타나 지루함을 덜어줄 것이다.

 

비판을 할 수 없으면 애정이 묻어 나오는 글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싫음을 표출하는 것도 금기시되는데, 그렇다고 열렬히 사모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다지 ‘쿨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닌 글이 읽는 사람에게 재밌게 읽힐 리도 없다. 전시를, 작업들을 보는 내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는 뒷전이고 ‘담론’ 혹은 ‘분석’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조한 읊조림만 이어진다. 그런 글들을 읽고 전시를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비평이 자리잡을 터전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현실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평이 사라진 지면에서 멋드러진 건물을 가진 미술관, 왜 ‘핫’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핫’ 아티스트로 여겨지는 누군가, 돈뭉치가 흐르는 미술시장에 대한 이야기들이 비평을 대신하고 있다. 일간지로 넘어가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언제부턴가 광주비엔날레가 ‘세계 5대 비엔날레’로 불리기 시작하는데 어째서인지는 알 길이 없다. ‘K아트’의 참맛을 보여주겠다고 ‘한국예술전사’들이 나서고 있다는데(2015년 4월 6일 한국경제) 이들이 어떤 작업을 해왔고, 어떤 평가를 받아왔는지는 큰 관심이 없다.

 

비평적 검토가 정지된 곳에선 미술이 ‘이름값’과 ‘그림값’으로만 회자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수록 피해를 보는 것은 창작자다. 자신이 작업을 통해 펼치는 이야기로 회자되기 점점 더 어려워지니 말이다. B가 A에게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더라도, 누군가는 A에 맞서 B를 옹호하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꺼냈을 것이다. 그 과정들이 더 많이 오고 간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B의 작업들을 보기 시작할 것이고, 그의 작업이 사람들의 입에 더 많이 오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B는 A의 입을 막음으로써 자신에 대한 공론을 규격화했다. B는 자신이 이 정도로만 이야기 되어도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렇게 작업들을 박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이 지금의 미술계라면, 미술의 적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권혁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