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노동이다 (2) 토마스 앨세서의 ‘신 투명성’에 대하여

*편집자주: 난데없는 태풍에서 출발한 작가 유병서의 이 글은 마약거래상의 트럭을 지나 난데없이 독일의 한 여객기 추락사고를 경유해 벤야민의 성좌까지 가 닿은 후, 하룬 파로키의 <레이버 인 싱글 쇼트>로 착륙한다. 여기서 비평가 토마스 앨세서의 역할은 관제탑 같다. 그는 파로키의 작업을 통해 노동을 ‘신 투명성’이란 키워드로 재조명한다. 교신 부호는 위장, 기다림, 여가활동. 과연 파로키의 작업은, 앨세서의 비평은 현대사회와 예술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http://www.labour-in-a-single-shot.net에서 위 작품들을 볼 수 있다.)

 

3월 31일, 난데없는 태풍이 베를린을 덮쳤다. 이날은 또한 캘리포니아 출신의 인디 뮤지션 토로이모아(Toro y moi)의 베를린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몇 달전 티켓을 구매했던 터라 공연 관람차 크로이츠베르크 지구를 찾았다. 공연장은 평소 태연한 마약거래로 유명한 고틀리쳐 파크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이 일대는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난민들의 고용에 대한 독일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마약거래가 횡횡한 걸로 유명하다. 마약거래상들은 주로 아프리카와 아랍의 난민 청년들로, 이들이 단속을 피하기 위해 공원의 나무 사이에 드럭을 숨기기 시작하자 베를린 정부는 고틀리쳐공원의 나무를 전부 벌목하는 난해한 결정을 내린바 있다.

 

지난 4월 6일까지 베를린 HKW에서 -레이버 인 싱글쇼트-가 전시되었다
지난 4월 6일까지 베를린 HKW에서 -레이버 인 싱글쇼트-가 전시되었다

 

물론 벌목 이후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공원의 나무들이 원인을 제공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관념론과 유물론이 대립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화학적으로 결합하지도 않는 베를린 특유의 사유기반은 때론 고틀리쳐 공원 같은 기이한 지형을 만든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난민의 유입을 받아들이긴 하지만(관념론)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 노동을 인정할 경우 이것은 또 다른 사회갈등을 유발한다(유물론). 하지만 이러한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할 경우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독일식으로, 모든 문제는 원인에 기반하며 따라서 이 경우에도 원인을 제공한 출처를 찾아야 한다. 그 결과 공원의 나무가 원인제공자로 몰리게 되는 논리적이지만 기이한 해법이 제시되고 그 결과 공원의 나무가 제거되는 기이한 풍광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드디어 베를린 정부가 마약거래를 실질적으로 제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다. 4월 1일 베를린 경찰은 고틀리쳐 공원을 중심으로 하는 대대적인 마약 단속 계획을 발표하였고 이 계획의 핵심은 ‘눌 톨레란쯔(null toleranz)’, 즉 무관용주의임을 강조했다. 독일 정부는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 전역에서 비합적인 약물 사용에 대해서 철저하게 응징하겠다는 계획을 천명한 것이다. 아마 여기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3월 23일 발생한 저먼윙스 4U9525기 사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먼윙스 4U9525
저먼윙스 4U9525

 

사실 독일식 사유를 따르면 사고기의 원인은 말 그대로 ‘불가항력’이다. 즉 원인이 없이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해법도 없다는 논리다. 한편 프랑스 검찰이 조종사의 자살비행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하자, 발표 직후 각국 항공사들은 , 조종실에 2명을 의무적으로 두는 미국식 규정의 도입을 서둘러 발표한다. 하지만 정작 사고 당사자인 저먼윙스의 모회사인 루프트한자의 카르스텐 슈포어 최고경영자는 절차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이번 사고는 별도 사례이다라고 발표 한다. 이 발언이 공개되자 그의 트위터 계정은 말 그대로 융단폭격을 당한다. 전세계에서 비난 여론이 폭주한 것이다. 그러자 슈포어는 입장을 180도 바꿔, 루프트한자에도 동일한 규정의 도입을 발표한다. 즉 사고의 인과율이 강제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사실 조종실에 두명의 조종사를 둔다고 해서 자살비행의 확률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살비행을 결심한 누군가가 일단 비행기에 올라타는 순간, 사고의 확률은 급격하게 높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프트한자가 점검하려고 한 것은 사고 발생시 대비책이 아니라, 아예 사고 자체를 방지하는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에 가깝다. 단서는 미연방항공국(FAA)이 발표한 통계에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발생한 2758건의 개인 비행기 사고 중 8건이 ‘자살 비행’으로 분류된다. 이 중 6건은 조종사가 음주했거나 항우울제를 복용한 상태라는 것이다. 즉 루프트한자 더 나아가서 독일의 대처 방식은 잠재하는 모든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다. 혹시 비행기의 조종석을 잡을 지도 모를, 비행사가 복용할지도 모를, 항정신성 약물을 사회속에서 최대한 제거하고, 정신과 치료 전력을 지닌 조종사 및 요주 인물의 비행기 탑승을 최대한 배제하겠다는 것이 독일식 인과율을 적용한 최대한의 해결책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식 방법론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 슈포어의 발언의 요지인 셈이다.

 

 

정지상태의 변증법

 

슈포어의 발언에서 확인 할 수 있는 독특한 사고를, 특히 벤야민의 사유와 연관지을 수 있겠다. 헤겔 식의 변증법이 정과 반의 합을 통한 도식적인 방식으로 결정되고, 아도르노의 변증법이 내가 나를 부정하는 성찰적인 방식으로 전개될 때 벤야민의 변증법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계속해서 생각하는 정지 상태에 머물게 된다(정지상태의 변증법(dialectics at a standstill)). 중요한 것은 이 사유의 방법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무력하고 수동적인 상태라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구별되는 상당히 적극적이고 풍성한 고찰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한 것은 문제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문제로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 자체를 집요하게 탐색하는 일이 성급한 문제 설정과 얄팍한 해결보다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말하자면,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는 특정한 사건을 정지의 상태로 놓고 이를 계속해서 ‘반복’함으로써 사유하는 벤야민의 변증법을 창작의 방법론으로 도입한 대표적인 작가라 할 수 있다. 그가 사유하고자 하는 장면은 영화의 기원, 즉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1895)이다. 이를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관찰함으로써 파로키는 오늘날의 현대사회를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일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그것은 ‘노동’을 주제로, ‘영화’를 매체로 하는 이른바 <레이버 인 싱글 쇼트(Labour in a Single Shot)>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의 번역가이자 비평가인 토마스 엘새서에게 파로키의 관점은 이른바 ’신 투명성(the new insivibility)’의 문제로 전개된다. 엘새서는 파로키의 작법에 비추어 영화를, 특히 노동과 관련한 투명성과 반-투명성의 경계를 드러나게 하는 실천의 형태로 조명하려 했다.

 

 

투명함, 기다림, 여가활동 그리고 노동

 

엘새서는 이를 ‘투명한 노동, 노동의 투명함(invisible labour and labour as invisible)’ 로 설명한다. 노동이 투명하다는 이야기는 노동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변증법적으로 변화하여 오늘날 노동을 노동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경계를 드러낼 수 있는 매개(medium)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반대로 ‘투명한 노동’ 이라는 이야기는, 소위 ‘노동 같지도 않은 노동’이 노동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즉 전통적 의미에서 노동의 범주에 속하지 못했던 행위들이 어느덧 우리 사회 속의 중요한 ‘노동’이 된 것이다.

 

엘새서에 따르면 이러한 ‘신 투명성’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는 ‘위장으로서의 노동, 그리고 노동으로서의 위장(Labour as camouflage, camouflage as Labour)’이다. 이는 루프트한자가 도입하겠다는 조종석 2인 탑승 의무제와 연관된다. 즉 여기서 추가 되는 노동은 일종의 감시자의 역할이다. 조종사는 조종사로 위장해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승무원은 승무원으로 ‘위장’해 조종사를 감시한다. 즉 기본적으로 주어진 노동에 새로운 차원의 노동이 더 부과된 것이다.

 

두 번째는 ‘기다림으로서의 노동, 그리고 노동으로서의 기다림’이다. 전통적으로 경찰관이나 소방관등 주로 재해나 사건을 대비하는 이러한 유형의 노동은 오늘날 사회전반으로 확장된다. 비행기 승무원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차원의 노동도 이 기다림과 연관된다. 즉 이들은 특정한 사건을 기다리게 되고, 이 기다림 자체가 하나의 노동이 된다. 기다림의 노동, 노동으로서의 기다림이 노동으로 드러나는 상황은 오로지 파국의 상황, 즉 사건이 발생하는 오직 그 상황뿐이다.

 

마지막 차원은 노동은 ‘여가활동으로서의 노동, 노동으로서의 여가활동(Labour as leisure, Leisure as labour)’이다. 앨세서에 따르면 이 차원의 노동은 유비쿼터스 환경, 각종 미디어들의 비약적인 발전과 연관된다. 예를 들어 비행기 조종사들의 여가활동은 앞으로 완벽하게 통제된다. 술을 마실 수 있지만 조심해야 하며, 정신과 상담을 받지 않기 위해, 또 각종 향정신성 약물과 거리를 두기 위해 이들의 여가는 건강하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관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이 부과된 차원의 ‘노동’이지만 그 경계는 매우 흐릿하고 모호하다. 즉 일상은 이제 노동의 지배를 받고 노동 그 자체는, 그 자체로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투명하게 위장된, 기다림으로 점철된, 일상 그 자체가 된 노동은 투명하게, 아주 투명하게 우리 사회 속에 자리한다. 그리고 이 투명함을 투명하게 만드는, 투명하게 자리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의 예술의 역할이 된다.

 

 

아웃소싱 vs 리소싱 / 자유 vs 긴장 / 프레이밍vs리프레이밍

 

투명한 이데올로기를 불투명하게 드러내고, 이 양자 간의 경계를 신체적으로 확인하는 실천 (곧 예술)의 방법론으로, 어떤 것이 가능한가? 바로 이 방법론이 엘새서가 파로키의 번역가를 자처하며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이다. 엘새서의 해석은 이렇다. 먼저 엘새서는 파로키가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의 영화를 이어 받아 전개한 실천에 주목하며 ‘아웃소싱 vs 리소싱’ 의 관계‘항’을 제안한다. 아웃소싱이라는 것은 생산을 소비하는 것이고 리소싱이라는 것은 소비의 주체에서 생산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의미, 즉 예술이다. 즉 노동자가 적극적인 의미생산의 소비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스스로 예술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파로키가 제안 하는 싱글쇼트의 경우 아주 간단한 규칙으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한 카메라 조작법만 숙지하고 있으면 싱글쇼트를 ‘생산’ 할 수 있게 된다.

 

엘새서가 주목하는 다음의 관계항은 이 싱글쇼트의 규칙과 관련이 있다. 싱글쇼트는 기본적으로 자유롭다. 노동에 관련한 것이라면 어떤 내용도 담을 수 있다. 단 규칙은 첫 번째 편집을 배재하는 것, 그리고 반드시 2분 미만의 영상이라는 것이다. 엘새서는 이 규칙을 ‘자유 vs 긴장(freedom vs strain)’으로 번역한다. 즉 자유롭되 규칙을 인지할 것, 또한 규칙을 인지하되 자유로울 것이라는 양가적인 태도가 투명한 이데올로기를 신체적으로 인지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마지막 방법론은 ‘뤼미에르를 따르기’와 ‘뤼미에르를 반하기’라는 관계항이다. 뤼미에르의 최초의 영화는 고정된 프레임에서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다. 이를 엘새서는 ‘프레이밍’ 즉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냉정하게 바라보기’로 해석한다. 반면 뤼미에르를 반하는 시도도 있다. 이는 트랙킹, 줌밍, 패닝 등등을 허용한 파로키의 싱글쇼트 방법론과 연관된다. 그것은 바로 ‘다시 관찰하기’, ‘ 재 관찰하기’, ‘따라가며 관찰하기’ 등 ‘리프레이밍’ 으로 요약된다. 다양한 층위의 변증법으로 복잡하게 전개되는 현대사회의 특성상 한 곳에 버티고 서 있다가는 장면 자체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따라서 시선과 관심은 유지하되 피사체의 전후, 좌우, 또는 이 이면을 좆아 계속해서 프레이밍을 반복해야 할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리프레이밍은 바로 이러한 현대사회의 특성과도 연관된다.

 

(유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