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열정이 있어 하는 일이니 페이는 조금만 받으라

지난 겨울은 ‘갑질 논란’으로 뜨거웠다.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은 승무원이 마카다미아를 접시에 담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회항 시키는가 하면,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은 인턴 사원들에게 ‘네가 열정이 있어 하는 일이니 페이는 조금만 받으라’는 식의 ‘열정 페이’를 지급해 논란을 빚었다. 특히 이상봉 디자이너는 청년유니온이 주관한 ‘2014 올해의 청년착취대상’에 선정되는 등 많은 20대와 대학생들로부터 비난 받았다. 그들은 왜 열정 페이에 그토록 분노했을까?  주변에 만연한 열정 페이의 실태를 들여다보았다.

 

▲ [사례1] ‘복커청’에 열정을 바치다

한예종 영상원 재학생이 연출한 다큐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는 패션 잡지 에디터 장용헌(28)씨는 얼마 전 억울한 경험을 했다. 모 대학에 재학 중일 때부터 패션에 관련된 독립 잡지를 만들며 에디터의 꿈을 키웠던 그는, 지난 해 12월 A 패션 잡지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비록 인턴이었지만 사실상 정직원 임명이 보장된 자리였기에 의욕이 넘쳤다. 한 달 새 네 개의 원고를 작성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원고료를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일자리도 잃었다. 잡지가 폐간됐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주요 서점에 배치되는 등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잡지사였으나, 본사의 구조조정에 의해 돌연 문을 닫고 만 것이었다. 정직원들은 “타 부서에서 일할 기회를 주겠다”는 형식적인 제안이라도 받았지만, 인턴이었던 용헌 씨는 기회는커녕 원고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화가 날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용헌 씨는 담담했다. 패션 잡지계에서 그 같은 부조리는 이미 만연해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전에 B 잡지사에 어시스턴트로 일한 적이 있다”며,“한 달 월급이 15만원이었다. 차비와 밥값으로도 모자랄 박봉이었으나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네가 어디 가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겠느냐’, ‘너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다’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는 “주어진 일도 ‘복커청(복사, 커피 심부름, 청소)’을 비롯한 잡무와 잔심부름이 전부였다”며, “‘진짜 업무’는 틈틈이 어깨 너머로 배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용헌 씨는 “패션 잡지계는 신입보다 경력을 선호한다. 몇 개 되지 않는 메이저 잡지사들이 서로 경력자들만 돌려 쓰며 진입 장벽을 공고히 하다보니 신입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막내 나이가 30대 초반일 정도”라며, “그처럼 기성세대가 꽉 잡고 있어서 ‘열정 페이’와 같은 구시대적 발상이 만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 [사례2] 만만한 게 대학생?

열정 페이의 사례는 한예종에도 있다. 강진수 씨(예술사 10학번)는 디자인과에 재학 중이던 당시, 지인으로부터 “공연 디자인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성균관대 모 교수가 연출을 맡은 공연 <자유부인>에 사용될 영상의 배경을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진수 씨는 해보겠다고 말했다. 좋은 경험이 되리라 기대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오전 9시부터 저녁을 훌쩍 넘기는 시각까지 일해도 주어지는 일당은 고작 3만원이었고, 당초 약속했던 배경 디자인 업무는커녕 늘상 동대문에 가서 소품을 사온 뒤 무대에 배치하는 업무만 반복했다. 자정이 다 돼서 일이 끝날 때면 택시를 타고 귀가해야 했는데, 야근 수당과 차비 지원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진수 씨는 공연이 당초 예정된 회차보다 연장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뒤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그녀는 “경험도 수당도 쌓지 못한 경험이었다”며, “나는 다른 학교 학생이었으니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연출을 맡은 교수의 제자들은 그러지도 못하고 교수와 선배들의 눈치만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내게 업무를 제안했던 언니도 연출가의 제자였는데, 단지 학과 학생이라는 이유로 부당함을 감수하고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한편, 진수 씨 역시 용헌 씨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부조리한 경험에 대해 덤덤한 반응이었다. 예술 학교에서 ‘열정 페이”의 사례는 그렇게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는 “모 학교 영화과 학생들이 도움을 청해 온 적이 있는데, ’페이는 못 드린다‘는 말을 무척 당당하게 해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면서, “디자인과에 재학 중일 당시 제안 받은 몇몇 디자인 업무 또한 ’페이는 많이 못 드린다‘는 말을 심심찮게 했다”고 말했다.

 

▲ 대책과 한계

그렇다면 열정 페이에 대책은 없을까? 몇 가지 변화의 움직임이 있다. 천 만 관객을 넘긴 영화 <국제시장>은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전 스태프와 ‘표준근로계약’을 체결했다. 제작사인 JK필름 길영민 대표는 YTN과 인터뷰에서 “촬영에 참여한 모든 스태프, 막내 스태프까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대형 투자·배급사로 알려진 CJ엔터테이먼트와 롯데시네마는 각각 지난해와 올해를 통틀어 20여 편과 3편의 영화에 대해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했거나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용노동부 또한 열정 페이 논란이 불거지자 지난 2월 23일 ‘2015년도 사업장 감독계획’을 발표하고 패션업계와 제과·제빵업계의 인턴 및 견습생을 비롯해 호텔과 콘도 등 인턴을 다수 고용하는 업체들을 대상으로 근로감독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기업과 정부 차원에서 개선의 노력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같은 움직임이 사회 전반에 만연한 인식을 하루아침에 개선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용헌 씨와 진수 씨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경력직을 선호하며 신입에게 일감을 주지 않는 문화’나 ‘제자(인턴)를 잔심부름꾼으로 취급하는 인식’들은 제도적 정비만으로는 미처 다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도적 장치가 있다고 해도 ‘을’들이 그것을 활용해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다.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 있었던 진수 씨와 달리 연장된 공연에 대해 ‘교수와 선배들의 눈치만 보며 그만두지 못하던 제자들’의 사례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 또 다른 문제

알바천국이 2·30대 구직자 1,204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인턴 열정 페이 현황’에서 “인턴 근무 시 보수가 적고 일이 힘들어도 기꺼이 참겠다”고 답변한 비율이 65.2%에 이르는가 하면, <동덕여대 학보>에서 재학생 1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갑의 횡포를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는 물음에 “참는다”고 답변한 비율도 54.4%로 과반이었다. 이들은 각각 “힘든 일도 다 경험(55.6%)이며, 취업난시대에 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22.5%)”거나, “부당함에 맞서봤자 을의 손해만 커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을들이 갑의 횡포에 많이 지쳐 있다는 인상이다.

한편, 알바천국의 설문에서 열정 페이에 대해 “참지 않겠다”고 답변한 응답자가 34.8%, 동덕여대 학보의 설문에서는 45.6%로 과반에 달했다. 알바천국의 34.8%의 응답자 중 65.7%는 “인턴과 견습생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싶다”는 이유를 들었고, 14.1%는 “계속 두면 나를 무시할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법과 제도가 단기에 문제를 개선해내기는 어렵다. 결국 갑과 을이 상호 노력을 통해 인식을 바꿔나가야 하는데, 특히 20대와 대학생이 대부분인 을들의 적극성이 요구된다. “맞서봤자 손해만 커질 것”이라며 움츠리기보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법과 제도가 아무리 합리적으로 갖춰지더라도 ‘기꺼이 참는’ 이들이 65.2%에 달하는 현실에서는, 을을 우습게 보는 갑의 인식이 결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며, 언제고 부조리는 다시 발생할 테니 말이다.

 

(성민규 기자)